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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담론이 의미를 가지려면
저출산 담론이 의미를 가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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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8.0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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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변호사
박지원 변호사

지난 글에서 연금 걱정 없게 아이 좀 낳아달라던 50대 지인을 향해 저출산은 외려 문명 발전과 인권 신장의 결과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다. 온통 저출산을 걱정하는 목소리 일색이니, 반골기질에 혼자 ‘노’라고 외치고픈 마음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공포 마케팅처럼 보이는 저출산 우려 담론에는 쉬이 동조하기 어렵다.

일단 국가주의적 시각이 내재된 듯해 거부감이 든다. 이런 위정자나 경영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다보면 사람을 도구 취급하기 쉽다. ‘덮어놓고 낳으면 거지꼴 못 면한다’며 국가가 불임수술하던 때가 60년 전이다. 출산율이든 GDP든 수치를 목표로 삼는 순간 비인간적인 발상은 끊어내기 어렵다.

대통령도 ‘사람이 먼저’를 외치는 시대다. 시민이 굳이 국가와의 일체감에 관료집단의 걱정까지 짊어져야 하나. 해서인지 ‘정부야 아무리 나대봐라. 애 낳나. 고양이랑 살지’라는 일갈을 듣노라면, 며느리에게 불임수술 권하러 온 공무원을 곰방대로 쫓아내던 60년대 시아버지 모습이 겹쳐 못내 후련한 마음도 든다.

국가주의적 저출산 우려 담론은 늘 암울한 경제 전망을 동반한다. 그러나 수십 년 뒤의 경제를 예측하는 시도는 그저 토정비결처럼 재미삼아 보는 것으로 족하지 않나 싶다. ‘식량은 산술급수로 증가하고, 인구는 기하급수로 증가’한다던 맬서스의 예측이 어찌됐나. 화학비료로 식량 생산은 폭증했고, 인구 감소를 걱정하게 됐다. 70년대 로마클럽 보고서엔 석유가 2000년쯤 고갈된다더니, 올해 유가는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예측만 잘하면 돈을 버는 주식시장에서도 수많은 전문가 예측이 수개월을 못 버티고 명멸하는데 누가 수십 년 뒤를 장담하는가. 섣부른 예측보다 기술혁신과 인간의 적응력을 믿는 편이 낫지 않을까. 오죽하면 주식 격언에도 ‘시장은 예측보다 대응’이라 한다. 하나 더 보태자면 ‘비관론자는 명성을 얻지만, 낙관론자는 돈을 번다’.

사실 암울한 경제전망은 지난 세월 한국이 겪은 ‘인구보너스’ 즉, 생산가능인구가 많고 부양대상은 적던 시기의 성장률이 유지될 수 없다는 불안에 기인한다. 그런데 지금 출산율을 높인다고 그 문제가 해결될까?

60년대 노동집약적 산업구조 하에서는 미숙련 노동이라도 투입만 하면 경제가 성장했다. 하지만 70~80년대 자본축적과 설비투자로 숙련 노동을 요하던 때를 지나, 이제 기계와 AI가 노동을 대체한다고 떠들썩하다. 생산요소 중 ‘기술’과 ‘자본’을 놓아두고, ‘노동’에만, 그것도 질 아닌 양에만 천착해서는 나아갈 수 없는 시대다. 청년실업을 보면 노동 공급은 이미 과잉이다.

소비 감소도 걱정된다지만 우리 경제가 내수의존이 아닌 수출주도형이라는 점은 모두가 알지 않나. 또 어차피 지금의 소비는 대부분 돈 가진 사람이 쓰는 사치재에서 발생하니 수요의 기준도 인구가 아닌 자본에 방점을 두어야 맞다. 아이가 줄어도 유아용품 산업은 성장하는 이치다. 부양부담, 재정파탄이 우려된다지만 같은 맥락에서 소득과 자본 없는 청년은 생산가능인구라도 부양대상에 불과하다. 장기로 보면 베이비붐 세대가 파도처럼 인구 그래프를 쓸고 간 뒤에 오히려 부담 없는 인구구조가, 심지어 다시 ‘인구보너스’기가 올 수도 있다.

누구도 국가나 특정 세대를 부양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현 구성원에게 충분히 행복한지 물어야 비로소 의미있는 대화가 시작되지 않을까. 낳고 싶은지, 낳기 싫다면 어째서인지, 낳고 싶은데 어렵다면 고민이 무엇인지 귀기울여보자.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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