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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에 동의하면 간첩"이라던 형사
"6·15공동선언에 동의하면 간첩"이라던 형사
  • 기고
  • 승인 2020.08.06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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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상 겨레말큰사전 상임부이사장
정도상 겨레말큰사전 상임부이사장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어느 아침이었다. 서울경찰청 보안과 소속의 형사들이 간첩행위에 관한 압수 수색 영장을 들고 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우선 집에 있는 두 대의 컴퓨터 하드를 압수한 뒤에 서가의 책을 뒤졌고, 침대 매트리스까지 들춰서 무언가를 샅샅이 찾았다. 간첩행위를 한 적이 없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노모를 비롯해 식구들은 날벼락을 맞고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며칠 후, 홍제동 산속에 있는 대공분실로 가서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화 도청 기록을 A4 용지로 칠천 페이지로 프린트를 해놓았고, 내가 인터넷에 접속해서 로그인 흔적을 남겼거나 메일을 주고받은 내용도 그만큼의 분량으로 프린트를 해놓고 있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아무개와 이러저러한 통화를 했죠?” 형사가 물었다.

“벌써 3년 전의 통화인데, 그걸 어떻게 기억합니까?” 내가 대답했다.

“제가 기억나게 해주겠습니다.” 하더니 형사가 그 날짜의 도청기록을 펼쳐 내게 읽어주었다. 특이한 내용도 없는 그런 통화였다.

아무리 뒤지고 뒤져도 나는 간첩일 수가 없었다. 실제로 간첩행위를 하지 않았으니 간첩이 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사가 아닌 논쟁이 시작되었다.

“6.15공동선언에 동의하죠?” 형사가 물었다. “당연히 동의하죠.” 내가 답했다. “그러니까 피의자가 간첩이라는 겁니다.” “아니 6.15공동선언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맺은 남북의 협약이며 동시에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속한 일인데, 그것에 동의하면 어떻게 간첩이 되고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는 겁니까?” “김대중은 개새끼죠.” 형사가 소리쳤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아무개씨의 간첩행위에 대해 증언을 해주면 아무 일 없는 것으로 처리하겠으니 협조하시죠.” 형사가 말했다. “나는 아무개 선배의 간첩행위에 대해 그 어떤 증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간첩행위에 대해 조사를 종결하자마자 형사는 새롭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내가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 현장에 참석한 것과 언론에 기고한 칼럼을 문제 삼았다. 국가보안법이 철폐되면 이적단체에 이익을 주기 때문에 ‘그 주장’만으로도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기소의견으로 검찰로 송치했다. 검찰에서는 사건을 질질 끌다가 최종적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내 귀에는 “김대중은 개새끼죠.”라는 형사의 외침이 생생하게 남게 되었다.

올해 2020년은 6.15공동선언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6.15공동선언뿐만 아니라 10.4 공동선언, 4.27판문점선언, 9.19평양선언에 이르기까지 남북이 합의했던 선언들의 이행이 거의 되질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6.15공동선언의 내용에 동의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그 형사가 떠오른다. 그 형사는 공무원이다. 왜 그랬을까? 문제는 소통이었다. 국가의 중대한 정책이나 과제에 대해 유관기관만 수행하는 게 아니라 다른 기관에 소속된 공무원 사회 전체가 이해하고 소통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보았다. 물론 업무상 다른 일일 수도 있지만 남북관계의 국정과제 등에 대한 포괄적 이해와 충분한 소통을 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선언의 이행이 달라질 것이라고 본다. 이제 새로운 통일부장관이 임명되어 정식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6.15공동선언에서 9.19평양공동선언에 이르기까지 그 이행의 방식에 대해 새로운 도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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