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0-12-03 20:44 (목)
[전라감사 100인 열전] 태종대 2인자 하륜
[전라감사 100인 열전] 태종대 2인자 하륜
  • 기고
  • 승인 2020.10.20 20: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종을 왕위에 올리고, 새왕조 조선의 기틀을 마련
진주 하륜 묘역(경상남도 기념물 41호, 문화재청)
진주 하륜 묘역(경상남도 기념물 41호, 문화재청)

하륜(河崙, 1347~1416)은 정안대군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고, 새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의 핵심측근이다. 정도전이 조선을 창업하고 건국직후 국정을 끌어간 태조대 2인자이고, 황희가 영의정을 18년간이나 하면서 유교사회를 구축한 세종대 2인자라면, 하륜은 태조와 세종을 잇는 그 중간에서 건국직후의 혼돈을 수습하고 새왕조의 정치체제를 구축한 태종대 2인자이다. 하륜은 『태종실록』에 510번이나 등장한다.

 

△고려말 전라도관찰사 부임

하륜은 고려말 최유경, 노숭, 김사안에 이어 공양왕 3년 9월 22일에 전라도 도관찰출척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4월에 교체되었다.

『고려사』에 그가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했던 일이 두 가지 나오는데, 『서경』의 「무일(無逸)」ㆍ「입정(立政)」편을 쓴 족자 2벌을 바친 것과 주문공(朱文公)의 「인자설(仁字說)」을 써서 병풍을 만들어 바친 것이다. 이 둘은 서로 연관되어 있는 일로, 공양왕은 성현들의 귀감이 될 만한 말을 모아 보내니 항상 좌우에 두고 성찰하겠다고 하였다.

하륜이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왜 이런 족자와 병풍을 공양왕에게 바쳤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공양왕이 선위하고 태조 이성계가 새왕조의 왕위에 오르기 몇 달 전이라는 점에서, 공양왕의 부덕을 탓하는 정치적 함의를 담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문과 출생비화

하륜(1347~1416)의 본관은 진주,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아버지는 순흥부사 윤린(允潾)이다. 그는 당대의 권세가 이인임의 조카사위이다. 그의 장인이 이인임의 동생 이인미이다. 하륜이 과거시험에 합격할 때 시관인 좌주(座主) 이인복이 하륜을 높게 보아 동생 이인미에게 사위로 삼도록 하였다. 하륜은 탁월한 재능으로 권세가 집안의 사위가 된 것이다.

그런데 『차문절공유사(車文節公遺事)』에 하륜이 연안차씨 서녀의 자손이라고 나온다. 문절공은 차원부로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성리학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고려의 수절신 두문동 72현의 하나이다. 이 책에는 또 조선건국세력 정도전, 조영규, 함부림 등도 차씨 집안의 서족(庶族)이라고 하였다.

하륜은 자신의 출생비화를 감추기 위해 태조 7년 자객을 보내 차원부와 그 일족 70여명을 살해하고 해주 신광사에 보관 중인 차씨족보 목판을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이런 출생비화가 차씨들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호남도선생안-하륜(우측에서 세번째)
호남도선생안-하륜(우측에서 세번째)

△이인임 측근에서 역성혁명세력으로

하륜은 1365년 19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인임이 실각하면서 그 일족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위화도회군후 복관되어 1391년 전라도관찰사에 임용되었다. 그는 이색의 문하생으로 동문들인 정몽주, 이숭인, 권근 등과 조선건국에 반대하다가 어느 시점엔가 역성혁명대열에 참여하였다.

하륜은 조선건국에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했으며, 새왕조 창업후에도 정도전과 갈등으로 정권에서 소외되었다. 명나라에서 표전문제로 정도전을 불러들이자 하륜은 정도전을 명으로 보내야 한다고 하여 정도전세력의 반감을 샀다. 하륜은 또 조선건국후 무학대사가 추천한 공주 계룡산 천도를 반대하고 무악(지금의 서울 연희동 일대)을 주창하였으나 중앙에서 멀고 터가 좁다는 반대에 부딪쳤다. 결국 정도전이 추천한 한양이 도읍지가 되었다.

 

△태종을 왕위에 올린 정사ㆍ좌명공신 1등

태종대왕회맹록(전주역사박물관) = 오른쪽에 조선국왕 이방원이라고 되어 있고,  왼쪽편에 정사공신 6번째로 하륜이 올라가 있다.
태종대왕회맹록(전주역사박물관) = 오른쪽에 조선국왕 이방원이라고 되어 있고, 왼쪽편에 정사공신 6번째로 하륜이 올라가 있다.

하륜은 태종 이방원의 사람이 되면서 부각되었다. 『태종실록』 총서에 보면, 그가 이방원의 장인인 민제에게 “내가 사람을 상 본 것이 많지마는, 공(公)의 둘째 사위 같은 사람은 없었소. 내가 뵙고자 하니 공은 그 뜻을 말하여 주시오.”라고 부탁하여 태종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하륜은 정안대군 이방원의 책사이자 최측근으로서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 역할을 다하였다. 『태종실록』의 그의 졸기에 보면, 하륜은 정도전일파를 미리 칠 것을 태종에게 건의하고, 1차 왕자의 난 때 충청도 관찰사로서 한양으로 올라와 정도전세력을 제압하는데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이 되고 진산군에 봉해졌다.

하륜은 2차 왕자의 난 때 회안대군 방간 세력을 제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봉되었다. 그는 건국후 정권을 장악하였던 정도전세력을 제거하고, 이어 정종의 양위를 받아 태종을 왕위에 올린 1등 공신이었다.

 

△새왕조의 기틀을 구축한 태종대 2인자

태종은 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새왕조의 정치체제를 마련하였다. 태종 5년에 6조의 권한을 강화시켜 재상들에게 집중된 군력을 분산시키고, 14년에 마침내 왕이 국정을 주도하는 육조직계제를 확립하였다. 하륜은 태종을 도와 이런 정치개혁을 단행해 간 주역이었다.

하륜은 정종대에 이미 우정승이 되어 정승반열에 들어섰고, 태종 2년에는 좌정승에 올랐으며, 태종 9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하륜은 신문고를 설치하고 종이 화폐 저화(楮貨)를 발행하는데 앞장섰으며, 태종 9년 영춘추관사로서 『태조실록』 편찬을 지휘하였다.

하륜은 태종 16년 나이 70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그해 10월 함길도 선왕의 능침을 순심하고 돌아오는 도중 정평(定平)에서 11월 6일 졸하였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으로 『호정집』이 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의 묘역은 진주에 있다.

『태종실록』, 그의 졸기에서 그를 평하기를 “천성적인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으나, 관복 차림으로 묘당에 이르러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하여 조금도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의 졸기에 아들로 적자 구(久)와 서자 장(長)ㆍ연(延)ㆍ영(永) 등이 나오는데, 17세기에 편찬된 만성보 『씨족원류』에 그 손자 복생( 福生)에 가서 적손이 끊긴 것으로 되어 있다.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