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1-01-26 19:40 (화)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86)선한 영향력, 설씨 부인 권선문(勸善文)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86)선한 영향력, 설씨 부인 권선문(勸善文)
  • 기고
  • 승인 2020.10.29 21:44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설씨부인 권선문과『1872년 지방지도』
설씨부인 권선문과『1872년 지방지도』

가을이 깊다. 자연이 빚어내는 풍경이 더없이 아름다운 시기이다. 그 풍경만큼 사람의 심성이 깊어 주변에 좋은 영향을 건네며 물들이는 것을 선한 영향력이라 한다. 이러한 선(善)함을 단풍이 번지듯 주변에 아름답게 펼친 조선판 선한 영향력의 흔적이 우리 지역에 남아 있다. 바로 보물 제728호로 지정된 『설씨 부인 권선문』이다.

 

『설씨 부인 권선문(薛氏婦人勸善文)』을 지은 이는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의 후손으로 세종 11년 순창에서 설백민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고령 신씨(高靈申氏) 신말주와 혼인한 설씨부인(1429~1508)이다. 그녀의 남편 신말주(1439-1503)는 신숙주의 동생이자 세종 때 공조 참판을 지낸 신장의 막내아들로 1454년(단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에 올랐다.

 

하지만, 계유정란을 일으킨 수양대군이 왕이 되고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상심하여 처가가 있는 순창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자신의 호를 딴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유유자적하며 지내다 훗날 전주부윤과 대사간, 전라수군절도사를 역임했다. 특히 그는 시문에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써 명필로도 이름을 알리며 본인을 비롯한 열 명의 원로들을 묘사한 『십로계첩』을 남겼다.

 

설씨 부인 또한 문장과 서화에 능한데, 부부가 순창에 지낼 때 불심 깊은 설씨 부인이 강천사 부도암의 중창을 위해 시주를 권하는 그림과 글을 지은 문서로 『설씨 부인 권선문』을 남겼다. 설씨 부인이 불사 참여를 독려한 이 작품은 조선 시대 여류 문인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꼽히며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보물이 되었다.

 

『설씨 부인 권선문』은 원래 문첩이 아닌 한 폭의 두루마리로 된 것을 잘 보관하기 위하여 병풍과도 같은 문첩 형식으로 개장하여 총 16폭이 되었으며, 그 크기는 가로 19.8㎝, 세로40㎝로 모두 펼쳐 놓으면 317㎝가 된다. 일부 보수한 흔적이 눈에 띄어 아쉽지만 대체적으로 보관이 잘 된 편으로 힘찬 글씨체와 더불어 수려한 그림이 조화롭다.

 

내용을 보면 전체 16폭 가운데 14폭은 권선문이고 나머지 2폭에는 채색화가 그려져 있으며, 특별하게도 뒷면에는 성화 18년(성종 13년 1482) 7월이라는 정확한 연대와 정부인 설(薛)이라는 인장이 찍혀있다. 조선의 여류 문인들의 작품이 대부분 시조 형식의 짧은 문장인데 비해 그녀의 권선문은 산문 형식으로 이루어진 장문이다. 조선 시대 여성 문인이 쓴 장문의 필적으로도 의미있지만, 설씨부인의 <광덕산 부도암도>는 사임당 신씨(1504-1551)보다 70여 년 앞선 채색화로 현존하는 조선 시대 청록산수화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귀하다.

 

주로 화초와 곤충을 그린 사임당 신씨의 작품과 달리 <광덕산 부도암도>는 설씨 부인이 지은 권선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으로 광덕산에 자리한 부도암의 경치를 소개한 실경산수화다. 멀리 보이는 산에는 침엽수를 묘사하며 찍은 듯이 그린 산의 형세와 수려한 소나무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이렇듯 산의 아름다운 절경을 표현한 것은 물론이고 그 속에 중창 후 모습을 드러낼 암자의 조감도와도 같은 그림을 섬세하게 그려 넣고 설씨 부인 본인이 권선문을 지은 까닭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 글을 보면, 어느 날 밤 꿈에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 나타나 “내일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너와 함께 선한 일을 짓자고 청할 것이니 즐거운 마음으로 따르되 게을리하지 말아라. 이것이 너의 복을 짓는 큰 근원이 될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과연 다음 날 아침 평소에 잘 아는 약비(若非)라는 사람이 찾아와 광덕산에 부도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세워 지키고 있으나 크게 쇠락하여 새로이 절을 짓고자 시주를 구하러 찾아왔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이 지난밤 꿈을 생각하고는 손수 선을 권하는 그림과 글을 지어 시주를 구하게 했다는 것이다.

 

권선문의 내용에는 암자가 크지 않은 규모이다 보니 부인 본인의 시주만으로도 지을 수가 있지만, 옛 사찰을 보수하면 천하의 복을 받는다니 모든 이들이 함께 불사를 일으킴이 마땅하다. 그런 연유로 부도암의 중수에 동참하는 선을 행하면 응보의 복을 받으니 “감히 이 글을 써서 모든 이들에게 선을 권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조선 초기 명문가의 정부인이 사찰의 중창 불사에 관심을 갖고 불교의 인과응보법을 설명하며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다.

정인보의 1934년 동아일보 기사와 신말주후손세거지
정인보의 1934년 동아일보 기사와 신말주후손세거지

『설씨 부인 권선문』은 부도암 스님의 부탁을 받은 약비의 청을 받아 지은 글이라 하여 <증약비문(贈若非文)>이라고도 한다. 이는 처음에 부도암에서 보관하였으나 암자가 다시 쇠락해지자 고령 신씨 귀래공파의 가문으로 돌려주어 보관하다 지금은 국립전주박물관에 위탁되었다. 『설씨 부인 권선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사연도 특별하다. 한학자이자 교육자인 정인보가 순창을 찾아 『설씨 부인 권선문』을 접하고 크게 감동하고 1934년 동아일보에 <권선문평해>를 연재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정인보가 『설씨 부인 권선문』을 접한 곳은 순창의 남산대 마을이었다. 이곳은 신말주와설씨부인이 지낸 곳으로 특히, 신말주가 터를 잡을 때 풍수에 귀(貴)가 보장된 장소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제주목사(濟州牧使)등 주요 관직을 역임한 실학자이자 고지도를 제작한 신경준과 그 후손들이 대대로 세를 이루며 살아 ‘귀래정 신말주후손세거지’로 불리는 귀한 장소가 되어 1994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었다.

강천사 가을전경
강천사 가을전경

또한, 설씨부인의 권선문과 인연이 있는 강천사는 887년(진성여왕 1) 도선이 창건한 사찰로 고려시기에는 열두 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사찰로 천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이르러 쇠락해졌고 몇 차례 재건하였으나 임진왜란과 6·25전쟁으로 불에 훼손되었다가 이후 신축한 뒤 비구니의 도량으로 전승되고 있다.

 

호남의 소금강이라는 찬사를 얻는 강천산은 단풍이 고운 곳으로 매년 11월 초순께 절정을 이루는 단풍명소로 손꼽힌다. 이제는 구름다리도 놓인 관광명소로 더욱 알려졌지만, 곳곳의 이름난 바위들과 비룡폭포로 절경을 지어내며 강천사를 비롯하여 강천사 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92), 금성산성(전라북도기념물 52), 순창 삼인대(전라북도 유형문화재 27), 강천사 모과나무(전라북도기념물 97)등의 문화재를 품고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때에 고운 단풍과 함께 설씨부인의 <광덕산 부도암도>가 그려진 강천사 부근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복을 나누고자 글과 그림으로 선함을 권한 그 선함과 자비로움을 헤아리며 이 가을 깊어가기를 소망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강상구 2020-10-30 22:16:17
강천사를 몇년전 봄과 가을에 찾았지만 풍경에 도취되어 미쳐 몰랐더 보물 애기를 여기서 접했다. 선조의 유적을 잘 관리하는 것도 후손들이 할 일이다. 조상의 유산은 한 가문에서 그치지 않고 지역, 국가에서도 귀중한 보물이 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