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스트푸드의 대명사격인 맥도날드가 1986년 로마에 매장을 열자 이탈리아 전통시장 상인들이 큰 충격에 빠졌다. 이에 지역 고유의 전통음식을 지키려는 슬로푸드(Slow food) 모임이 곳곳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99년 10월 그레베 인 키안티를 비롯해 오르비에토, 포지타노, 브라의 시장들이 모여 슬로푸드에만 국한하지 말고 도시의 전체에 느림을 도입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때 내건 슬로건이 이탈리아어로 치따슬로(Cittaslow)로 슬로시티(Slowcity)운동의 출발점이 됐다.
슬로시티는 단순히 느리다는 의미보다는 대도시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지역의 자연 환경 전통산업 문화·음식 등 고유한 자원을 지키면서 지역민이 주체가 되는 지역경제살리기 운동이다. 그렇다고 현대 문명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지역의 정체성을 갖고 옛 것과 새 것의 조화를 위한 지역공동체운동이자 기다림의 철학을 실천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슬로시티 국제연맹 로고인 달팽이가 슬로시티의 정신을 잘 대변한다. 달팽이는 약육강식의 생태계에서 느리지만 자기만의 생존방식으로 살아남았고 3만 종 이상 분화한 고등생명체이다. 그렇지만 달팽이는 등딱지가 없으면 바로 죽게 되는데 심장 같은 주요 장기가 등딱지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달팽이가 마을을 등에 업고 있는 모습은 마을공동체가 없으면 등딱지 운명처럼 사람도 살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국내에선 지난 2006년 한국슬로시티추진위원회가 처음 결성됐고 2007년 전남 완도군 신안군 담양군이 아시아에서 최초로 국제슬로시티 회원도시가 됐다. 전북에선 지난 2010년 11월 전주 한옥마을이 국제 슬로시티로 인증받았고 2016년에는 전주시 전역으로 확대해 재인증을 받았다. 현재 국제 슬로시티연맹에는 전주 김해 목포 등 국내 16개 도시를 비롯해 30개국 266개 도시가 가입돼 있다.
전주시는 지난해 국제슬로시티연맹이 주는 최고상인 ‘오렌지 달팽이상’을 수상했다. 흉물로 방치된 팔복동 공장을 예술공장으로 리모델링해 문화 소외 주민들에게 제공하고 성매매 집결지를 복합문화공간으로 바꾸고 전라감영 복원 등 도시재생에 큰 성과를 거둔 결과였다. 전주시가 이제 3번째 국제 슬로시티 인증에 도전한다. 하지만 전주 슬로시티의 중심지인 한옥마을이 상업화로 퇴보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주시가 세계적인 전통문화 슬로시티로 자리매김하려면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문화적 소프트웨어에 대한 고민도 가져야 할 때다. /권순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