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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인 100년의 삶] 상례의 어제와 오늘
[전북인 100년의 삶] 상례의 어제와 오늘
  • 전북일보
  • 승인 2000.01.0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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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장례풍속과 살아가는 그네들의 이야기를 잘 버무려 제작한 두 편의 영화 '축제'와 '학생부군신위'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장례풍속을 흥미롭게 그리고 진지하게 알려주는 방법의 하나로 두 편의 영화를 보여준 적이 있어 더욱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다. '축제'에서는 사람이 죽어 땅에 묻기까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상례(喪禮) 절차를 꼼꼼하게 보여주면서, 노인의 연로함과 아이의 순진함이 조화되어 죽음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영화였다. 죽음은 다만 잠시 동안의 헤어짐이며, 언젠가는 모두들 돌아가야 할 곳이고 거기서 다시 만날 것으로 믿는다. 오히려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삶의 고통이고 괴로움이다. 그래서 죽음의 문턱을 넘어 저 세상으로 떠나간 할머니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벗어 던진 아름답고 편안한 모습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얼마동안 살다가 반드시 죽는다. 죽음은 사람들이 거쳐가는 관문과 같다. 우리 민족은 생사(生死)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이 세상과 영원히 결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죽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장소를 옮겨가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을 삶의 연장으로 보고 있다.

미국에서는 노인들이 죽을 때까지 활동하고 또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려고 한다. 미국의 노인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를 미리 하지 않는다. 죽음을 생각하면 두렵기 때문에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고 방식이다. 이에 반해 우리 나라 노인들은 특히 죽음에 임박하면 자식들에게 자기 죽음과 사후 여러 가지 문제를 서스럼없이 상의한다. 세시풍속에서도 윤달이 들면 그 달은 귀신이 범접하지 않은 달이라 하여 연로하신 어른이 있는 집안은 수의를 미리 준비한다. 그리고 이를 지켜본 노인들은 슬퍼하기 보다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든든하게 여긴다. 그리고 사후의 유산 처리나 제사를 잘 모실 것을 암시하고 죽은 후에도 대접을 받기를 원한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禮)가 복잡하고 까다로우며, 그 중에서도 상례의 절차는 가장 까다롭다. 상례는 죽은 이를 위해 산 사람들이 진행하는 의례로, 죽은 이의 시신을 정중히 모시고 동시에 육신을 떠난 영혼을 성의껏 위로해준다.

상례는 다른 예에 비해 그 변화의 폭이 비교적 완만하다. 물론 옛날의 비하면 오늘날의 상례는 절차나 복식이 매우 간소화되고 있고 서구의 장례문화와 혼합되어 변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그래도 전해 내려오는 까다로운 절차를 고수하고 있는 편이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바로 땅에 매장하지 않고 초분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근 백년이 흐르는 동안 상례 가운데 급격히 소멸한 장례풍속은 초분이 아닌가 싶다. 1960~70년 무렵까지만 해도 남해안 지역과 도서 해안지역에서는 초분을 볼 수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초분은 집 가까운 밭이나 산자락에 자리를 정하여 관을 놓고 초가지붕처럼 마람을 들러놓았다가 3~5년이 지나면 날을 받아 이장한다. 전북에서는 초분을 '체변'이라고도 한다. 체변은 따뜻하고 아늑한 곳이면 되므로, 지관을 두지 않는다. 3년에서 5년이 지나면 살은 썩어 떨어지고 뼈만 남게 되는데, 이 뼈를 맞추어 명주나 비단에 싸서 7매를 묶어 상여를 써서 새 땅에 다시 묻는다. 이러한 초분은 언뜻 보아 원시적이고 비위생적이라 하여 야만적인 행위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육은 더러운 것으로 인식하여 몇 년에 걸쳐 탈육시켜 뼈만 다시 묻는 행위는 조상에 대한 숭배에 기인한 것이다.

초분을 하는 동안에 상주(喪主)는 한밤중에 침입하는 짐승들을 막기 위해 초분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머리를 빗지 않고 육류를 금하는 등 함부로 처신하지 않고 자제한다. 초분의 예로 들었지만, 상례는 분명 우리 민족의 조상 숭배의 관념에 더하여 효성의 표현이 융합된 의식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민족만이 갖는 정신적인 산물이라 할 만하다.

상가에서 곡하는 소리가 나면 마을사람들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상가집으로 달려가 일손을 돕는다. 마을마다 상포계(상복계), 위친계가 있어 상가집 돕는 것은 마을사람들 나름대로 규율이기도 하다.

사망이 확인되어 가족들이 애절하게 곡을 하면, 밖에서는 떠나는 영혼을 부르는 고복(皐復)을 한다. 예서에서는 망인의 웃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 왼손으로 옷깃을,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 북쪽을 향해 흔들면서 남자는 관직명이나 자(字)를 여자는 이름을 부른다. 그런데 전주에서는 망인이 죽으면 죽자마자 '혼백 던진다' 하여 짚으로 열십자를 만들어 마당 가운데 놓고 그 위에 물동우를 올려놓는다. 그런 뒤 망인의 상의를 물동우의 물에 적셔서 망인의 주소와 성명을 외치면서 지붕 위에 던져 두었다가 입관시에 내려 불사른다.

이러한 고복은 이생에 있는 사람들이 떠나가는 영혼을 부르는 것이며, 죽어서도 잊지 말고 집을 찾아와 달라는 바램이 담겨 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상가에 가더라도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이 되고 말았다.

고복이 끝나면 곧바로 '사자상'을 차린다. 이는 예서에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하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자주 목격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자상은 사자가 3명이라 생각하여 밥 세 그릇, 짚신 세 켤레, 동전 세 개, 소금 한 접시와 나물 등을 대문 밖에 차려놓는다. 물론 형식에 있어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죽은 이를 데려가는 저승사자들을 후히 대접하여 저승까지 잘 인도해 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옥황상제의 대리인 저승사자가 죽은 이의 집 앞까지 와서 데리고 가기 때문에 저승에 가더라도 자기가 살던 집을 잊지 말라고 '고복'을 하고 망인을 잘 모시고 가라고 '사자상'을 차리는 것은 모두 죽은 이와 영원히 결별하지 않고 언제가는 다시 만날 것이라는 믿음의 소산이다.

망인을 목욕시키고 수의를 입힌 다음에 물에 불린 쌀을 버드나무 수저로 세 번 입에 떠넣는 '반함'을 한다. 순창에서는 물에 불린 쌀을 망인의 입을 벌리고 오른쪽, 왼쪽, 가운데 순으로 세 번 떠넣는다. 이는 저승길 양식으로, 쌀을 넣으면서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 라고 말한다. 그리고 '백냥이요', '천냥이요', '만냥이요' 하면서 엽전 혹은 동전을 다시 세 번 넣는데, 이것은 저승길 노자돈이라 한다. 곳에 따라서는 돈 대신 구슬을 넣기도 한다. 저승길 가는 길이 외롭고 배고플 것 같아 돈이며 식량을 두둑히 챙겨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출상 전날 밤 철야를 하는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초상집 가서 밤이 새도록 고스톱 치며 술 마시는 것으로 변했지만, 망인이 극락왕생 하도록 기원하는 씻김굿을 하거나 상주를 위로하는 놀이를 하면서 밤을 지새운다. 그리고 상여 나가는 예행연습으로 빈상여놀이를 하기도 한다. 이는 상여꾼들이 밤을 새워 상여를 지키며 소리로 온갖 잡귀를 물리치는 것이다.

죽은 이를 위해 애도하고 슬퍼해야 할 초상집에 굿판과 노래판을 벌이는 것은 죽음은 분명 슬퍼할 일이 아니며, 더 좋은 세상으로 가기를 바라는 이생의 사람들의 염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흥겹게 놀면서 죽음의 의미를 삶의 의미로 전환하고 있으며, 아울러 망인을 기쁘게 해주어야 살아 있는 자손들에게 많은 복을 내려준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오늘날은 이러한 상례 절차를 대신하여 기독교식 장례, 불교식 장례라는 이름으로 그 종교에 맞는 장례 절차를 밟기도 한다. 기독교식 장례의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목사의 집례 아래 진행된다. 운명하는 사람의 영혼을 운명하는 순간부터 찬송과 기도 속에서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장례 절차에 있어서도 분향을 하지 않고 헌화를 하며, 상주, 유족, 친지, 조객의 순으로 한 송이씩 헌화한다. 장례식도 물론 예배로 거행된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쉽게 목격되고 있는 상례는 자기 집에서 초상을 치르는 대신 장례식장이나 병원 영안실을 이용하고 있다. 상주는 상복을 입는 대신 깔끔한 검정 양복을 차려입고 조문을 받으며, 문상객은 망인을 위해 절을 올리거나 기도를 하며 찬송가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3년만에 탈상하는 대신에 서둘러 3일만에 탈상하고 공동묘지에 묻고 돌아온다.

예전에는 장지에 묻기까지 상여꾼을 동원하여 상여를 메고 상여소리를 부르며 망인과 상주, 그리고 가족들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발인할 때에는 노제와 평토제를 모셨고, 매장 후에도 탈상 때까지 반혼제, 우제, 졸곡제, 소상, 대상, 길제 등 복잡한 제의를 모시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여소리를 부를만한 소리꾼을 찾기가 쉽지 않다. 대신 관과 가족을 실은 영구차로 장지에 도착한다. 그리고 미리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놓은 곳에 관을 묻고 돌아온다. 봉분을 만들 때도 마을에서 동원된 일꾼들이 한나절이 지나도록 땅을 다지며 준비하지만, 이제는 포크레인이 도맡아 순식간에 해버린다. 간혹 망인의 혼을 절로 인도하여 망인의 극락정토에 왕생시키기 위하여 불교 의식인 49제를 모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최근에는 국가에서 화장을 적극 권장함에 따라 더욱 장례풍속은 변화를 거듭할 것 같다.

이처럼 간소하게 변해 가는 장례풍속은 더불어 우리 조상들이 지닌 죽음에 대한 의식의 변화까지 초래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죽음 자체가 영원한 결별이요, 헤어짐이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곳으로 떠나는 영원한 갈림길로 인식하기에, 사람이 죽으면 그렇게 슬퍼하는 지도 모른다.

/서해숙(전라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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