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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추억의 아련함
아버지에 대한 추억의 아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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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1.14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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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영
진지영 씨
진지영 씨

내 고향 남도 들녘엔 봄이면 보랏빛 카펫을 깔아 놓은 것처럼 자운영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넘실댄다. 그리고 황룡강물이 아침이면 물안개 사이로 은빛 날개 반짝이며 흐른다.

한없이 둑길을 걸어가면 초록 밀밭이 일렁이는 고랑 옆 원두막이 있는데 그 밭이 아버지가 정성스레 가꾸시는 참외 수박 밭이다. 먹을 것이 그리 많지 않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여름이 되면 참외 수박만큼은 실컷 먹을 수 있었다. 한 낮엔 먼 동네 사람들이 참외 수박을 사 먹으러 오고 밤이 되면 서리를 해가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아버지는 한 계절을 원두막에서 주무셨다.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가지 않고 먼 둑길을 걸어 아버지가 일하고 계신 참외 수박밭으로 향했고 아버지께선 “어서 오니라.” 반겨주시며 진녹색 줄무늬 참외와 노란 참외 한소쿠리를 따다 주셨다. 나는 그 참외와 수박을 먹으며 원두막에서 숙제도 하고 아버지 심부름도 하다 해질 녘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읍내로 참외 수박을 팔러 가셨는데 땅거미가 지도록 오시지 않아 오빠와 나는 마중을 나갔다. 읍내까지 두어 시간이 족히 되는 신작로 길을 걸어도 걸어도 아버지 리어카는 보이지 않았고 매화동이라는 동네에 다달았을 때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보다 훨씬 키가 큰 아저씨들 네댓 명이 아버지 참외 리어카를 에워싸고 있었고 그 중 한 아저씨는 리어카 바퀴 위에 한 발을 올리고서 참외를 깎아 먹는 품새가 왠지 불량스런 아저씨들인 것만 같아 불길한 생각이 들면서 무서웠다.

아버지는 그 사람들의 행동을 속수무책인 채로 지켜만 보며 서 계셨는데 그 나쁜 아저씨들은 참외는 깎아먹고 수박은 쪼개어 놓고 하는 말 “에이! 맛없어!”라고 말하면서 과일 깎는 칼을 수박에 푹 꽂아 놓으며 돈도 주지 않고 가버렸다. 그 나쁜 아저씨들이 떠난 후 아버지는 우리를 리어카에 태우고 집까지 오는 동안 집에 있지 뭐 하러 왔느냐고...오빠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했다.

그 사람들은 읍내 유명한 불량배들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고스란히 수모를 당하시면서 초조함으로 일그러진 아버지 모습을 지켜만 보아야 하는 나는 그 나쁜 사람들에게 뭐라 항변할 수 없는 작은 마음이 이내 너무 슬펐다.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참외 수박을 보면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워 눈물이 흐르고 그 날에 분노와 아픈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시절의 부모들은 자신의 삶은 잊은 채 오직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였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우리의 생애는 현재가 과거가 되면서, 현재의 모습들이 모여 역사가 된다. 나와 우리 부모들이 살아온 모습들을 되새기며 추억하는 것은 서로 간의 관계를 잇고, 세대를 잇는 연결고리를 만드는 의미가 될 것 같아 옛 추억을 더듬어 본다.

수천 년을 흐르는 황룡강 모래섬 강변에는 지금도 종달새 울고, 황룡이 올라간 전설이 강에 아른거린다. 거울 같은 물 위엔 조각구름 가득 담고 모난 돌 다듬어 만든 조약돌 깔려있는 황룡강, 멱 감던 나의 유년 시절이 뭉클한 반가움에 눈시울 뜨거워 온다. /진지영

진지영은 학창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책만 읽다가 이순(耳順) 가까이 전북교육문화관 <시, 수필>반에 입문하여 현재 ‘글채움터’ 총무를 맡으며 창작수업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그의 처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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