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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중용
삶의 중용
  • 기고
  • 승인 2021.01.17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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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숙 우석대학교 약학과 교수
채병숙 우석대학교 약학과 교수
채병숙 우석대학교 약학과 교수

새해를 맞이하여 한 살 늘어난 중년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과연 세상을 보다 더 균형 있게 바라보며 행동하려고 노력할 것인가’라고 자문해 본다. 새해 신축년에도 여전히 고정관념, 나만의 상식 그리고 사회문화의 편향된 가치관에 갇혀, 세상의 충돌과 대립 속에서 감정의 균형을 잃고, 내 자신을 과소·과대 평가하고, 나의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리며, 갈등과 분열을 가져오는 균형 잃은 목소리만 높이면서 힘들고 파괴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세상을 균형 있게 바라본다는 것에는 중용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중용이란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를 말한다. 중용은 끊임없는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자연과 인간의 생명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연은 음과 양의 균형과 지속적인 변화의 흐름 속에서 중용의 생명력을 지닌다. 소우주인 우리 몸에서도 건강의 항상성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으로 중용의 균형이 삶에 녹아나야만 가능하다.

중용은 우리의 살아가는 방식에서 균형의 지혜를 말하고 있는데 특히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지나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용에 대하여 공자의 논어에서는 ‘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못한 것과 같다’고 하였고, 고대 그리스 아폴로 신전 입구에 ‘무엇이나 지나치지 않게’라는 경구가 새겨져 있다. 요즘 세상은 물질과 지식, 정보 그리고 가치관 표출 등이 부족하기보다는 넘치기 쉬운 시대이기에 우리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중용의 가치가 더 절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중용에서 말하는 중간이 아닌, 지나치지 않는다는 의미에는 삶 속에서 결정하고 판단하는데 혼란이 따른다. 세상의 정한 이치를 실행함에 있어서 중용의 치우치지 않음은 시대, 장소나 상황에 따라서 다르며, 각 개인, 가정, 사회,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그저 종교에서는 의와 참선을 말하고, 사회에서는 도덕과 상식을 내세우며, 국가는 정의와 엄격한 법의 잣대에서 최소한의 기준을 정하여 그 경계 안에 있을 것을 강조하고 있을 뿐, 우리의 삶은 중용을 충족시킬 수 없고 지나침으로 기울어지기 쉽기 때문에 많은 모순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자신과 사회는 중용의 지나치지 않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바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끊임없는 성찰이 수반되어야 한다. 생각에 의한 과도한 희노애락은 오장육부를 상하게 하고, 나 자신을 사회 도덕적 기준이나 종교적 신념의 틀에 맞추고자 스스로 지나치게 몰아갈 때 낮은 자존감과 죄의식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음을 중용의 지혜로 바로 보아야 한다. 또한 순수함을 지니고 출발한 사회적 가치관이 중용의 균형을 점점 잃어감으로써 역지사지, 소통과 타협 없이 내로남불로 치우쳐 갈등과 분열로 인한 소모적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약해지고 위험해지며 그 구성원은 점점 병들어 감을 중용은 말하고 있다.

매사에 중용의 삶을 요구하는 것은 불완전한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벅찬 일이다. 다만 치우친 삶에 따른 불편함과 고통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지혜를 중용이 제시하고 있음을 안다. 이제 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일을 들으면 곧 이해가 된다는 이순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삶에서 중용의 지혜를 보다 더 올바로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한 발짝씩 내딛으며 가야겠다. /채병숙 우석대학교 약학과 교수

△채병숙 교수는 식품의약품안전처 중앙약사심의위원회 전문가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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