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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41) 황매천 연구의 권위자 송남 이병기 시인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41) 황매천 연구의 권위자 송남 이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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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2.23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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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남 이병기 선생
송남 이병기 선생

송남 이병기 선생은 1931년 3월 10일, 전북 김제시 월촌면 명덕리 142번지에서 태어났고, 2008년 10월 9일 타계했다. 1956년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후, 전북대 대학원 석사, 전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익산의 남성여고를 비롯하여 도내 중등학교에서 10여 년간 근무했으며, 1975년부터는 전북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선생은 195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으며, 196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에 「석류초」, 「소연가」 등이 당선되면서 문단의 시선을 끌었다. 선생은 타계할 때까지 『석류초』 등 9권의 시집과 연구서 『황매천 연구』 등 5권, 번역서 『역주매천황현시집』 3권(공역) 등을 펴냈다.

신성적 시인은 선생의 첫 시집 『석류초』 서문에서 “시인은 새가 그 천후(天候)에 따라 까마귀처럼 어두운 조가(弔歌)를 부를 수 있고, 소쩍새처럼 통곡할 수 있고, 꾀꼬리처럼 구슬을 굴리는 노래를 할 수 있는 ‘중조(衆鳥)’이어야 하며 “폭풍우에 거목(巨木)이 흔들릴지언정 제자리를 잊지 말고 보다 먼 앞날을 노래하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는데. 송남 이병기 선생은 석정의 말씀대로 “중조의 시인”이 되어 문학의 밭을 일구었다.

허소라 시인은 선생의 제4 시집 『풍남문』의 발문에서 ‘굵직한 톤의 자기 세계’를 구축한 시인으로 ‘시세(時勢)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한국적 전통의식을 자기 나름의 새로운 호흡으로 표현’하였다고 했다.

오하근은 선생의 아홉 번째 시문집 『모악산』 발문에서 “모성(母性) 탐험(探險)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이 시문집은 ’우러러 모악산에 오르고 내려서 77세의 삶을 반성한다‘라는 제사(題詞) 붙어 있는 선생의 유고시집이다.

 

눈이 내리면

참으로 포근한 품안에 묻히데

서늘하게 맑은 숨 골라주는 품안

다소곳이, 어머니의 소중한 말씀에

 

-중략-

 

눈이 내리면

참고 참아 봄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품안

어디라고 싸움하는 형제들이 모일 것인가

어디라고 노래가 익을 수 없겠는가

가운데 앉아서 사방으로 문을 열어라

마음을 고르게 언제나 누구에게나 들리는

자장가 가락이 있데

모여 의논하는 삶의 가락이 있데

-「모악산3」의 일부

 

송남 이병기 선생의 어린시절과 자택에서의 하루.
송남 이병기 선생의 어린시절과 자택에서의 하루.

선생은 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한시(漢詩) 시집 『완산태평가』(1992)를 냈으며, 2001년에는 『한시연습』을 발간했다. 그는 “매천의 한시(漢詩)는 작품성과 표제적 주제성, 민속적 역사성까지 더하고 있어 후대들이 새겨볼 만한 작품”이라며 황현 연구에 몰두했다. 1944년의 『매천 시 연구』와 1995년의 『매천 황현 산문 연구』에 이어 2007년에는 완산고 김영붕 선생과 황현의 시를 공동번역하여 『역주매천황현시집』라는 책을 냈다.

송남 이병기 선생의 백양촌문학상 수상 장면.
송남 이병기 선생의 백양촌문학상 수상 장면.

선생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은 ‘소탈하고 격의 없는’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학문연구에서는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을 만큼 투철했고 꼼꼼했다. 동아리 지도교수로 하계 봉사활동에 참여한 선생은 구슬땀을 흘리며 모범을 보였고, 밤새도록 제자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삶의 지혜를 일깨워주었다. 선생의 77학번 제자들은 졸업여행 때 선생과 함께 한 추억을 떠올렸다. 거구의 체격임에도 가뿐히 한라산 정상에 오르더니 “제주도가 맷방석 같다!”라며 즉석에서 시를 읊조리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정상권의 「진정한 괴짜가 그립다」(새전북신문, 2006-06-16)에 나오는 일화다. 1980년 5월 학생 시위 때 “교수들이 앞장서야 경찰이 학생들을 때리지 못한다”라면서 선두에 섰다. 그날만큼은 경찰의 폭력진압은 피했지만, 선생은 5·17 이후 해직대상 우선순위에 들 만큼 위태로움을 겪기도 했다. 한때 총을 사서 사냥을 즐기기도 했지만, 술자리에서 “헤밍웨이처럼 자살할 때를 대비했다”라는 얘기에는 숙연해진 일도 있다 한다.

송남 이병기 선생의 전북도청 초빙 강연.
송남 이병기 선생의 전북도청 초빙 강연.

선생은 자녀들에게 승어부(勝於父)의 정신과 지덕겸수(智德兼修)를 강조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자녀들은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였다. 장남 이경재는 육군 준장으로 퇴역하여 원광대 교수로 근무했으며, 3남 이재운은 미국 베일러의과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장녀 이수월과 차남은 공무원으로, 차녀는 사업가로 일가를 이뤘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날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사모님에게 ‘여보 중전’이라고 부르면서 그동안의 미안함을 에둘러 표현했다. 말년에는 잇몸암이라는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펴내고자 했던 『모악산』은 어쩌면 시인이 아내에게 바친 마지막 헌사일지도 모른다.

또한, 시인의 고향 사랑도 특별했다. 구한말 황현과 이기와 더불어 3대 선비라 불리는 김제의 거유(巨儒) 석정 이정직의 문학과 미술을 발굴하여 널리 알린 바 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고향 마을에 많은 나무를 심기 시작했는데, 누가 묻기라도 하면 훗날 아이들이 이곳으로 소풍이라도 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며 좋아했다고 한다. 김제 검산공원에는 그의 시 「돌아가야 하리」를 새긴 시비가 그의 귀거래를 환영하고 있다.

 

두레가 나면

모두 즐기던 들녘 마을에

 

모정에 앉아 가을 나르던

젊은 보람의 결실에

 

울 없이 살아도

도둑 없이 도란거리는 이웃에

 

-중략-

 

돌아가야 하리

바작으로 부려놓 듯

두엄같이 구수한 마을에

 

-「돌아가야 하리」 김제 검산 체육공원에 있는 시비에서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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