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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19)전북 서정시의 원정, 최승렬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19)전북 서정시의 원정, 최승렬
  • 전북일보
  • 승인 2011.06.2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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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詩의 전통 '전원시' 다시 꽃피워

최승렬(園丁 崔承烈·1921~2003)은 전주 출신의 시인이다. 아버지 없이 자란 그는 살아가는 내내 어머니에게 지극한 효자였다. 그에 관한 하나의 일화이다. 그는 어릴 적에 서울의 여관에서 부엌에 장작을 지피고, 수원의 한 종묘장에서 씨앗을 골라내었다. 그는 일해서 받은 첫 월급으로 어머니에게 흰 고무신을 사다드렸는데, 어머니는 아들이 땀흘려 번 돈으로 사온 고무신이 아까워서 평생 동안 한번도 신지 않고 아끼다가 신발은 결국 영위 앞에 놓였단다. 그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철철 넘치는 사연이다. 청년 시절에 그는 흥안령 계곡과 몽고의 고비사막을 방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생과 방랑으로 점철된 그의 성장기는 커서 타인과의 접촉 기회를 차단하고, 자신을 문학과 학교 속에 유폐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해방 후에 귀국하여 국학대학을 졸업하고 목포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의 인연으로 그의 첫 동시집 '무지개(항도출판사·1955)'가 목포에서 출간된 것이다. 그 뒤에 그는 서산 등지를 전전하다가 전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도내 신문지상에 활발히 작품을 발표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안락을 누렸다. 고향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그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들처럼 평안하였고, 신석정을 찾아다니며 시를 공부하였다. 그런 이유로 그의 시에는 석정의 시풍이 배어 있다. 석정도 그를 끔찍하게 아꼈던지, 동시집에 글을 써주고 격려하였다.

최승렬은 전쟁 후에 전북 시의 전통이었던 전원시를 다시 꽃피웠다. 그에 이르러 엄격한 자기 수양으로부터 비롯된 정갈한 시형이 다시 살아났다. 그가 전주에 있는 동안에 쓴 작품들에는 자연 취향이 남다르게 표출되어 있다. 아마 고향에 돌아와 생활하는 도중에 갖게 된 정신적 아늑함이 평화한 성정을 돋보이도록 도와주었을 터이다. 아울러 이 시기에 전라북도의 시단을 지배하던 서정적 경향은 그의 시적 어조를 단정하게 가다듬어주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엄연히 시집을 낸 시인이라고 할지라도, 동시인 축에 들어야 맞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은 온통 사모곡이었고, 시적 주제는 항상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아들의 효도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수단으로 시를 썼던 것이다.

그런 성향은 전쟁 후에 발간된 시집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동족상잔을 겪는 동안에 어머니를 추억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그가 전후에 발간한 시집에서 전쟁이라는 거대 서사를 다루었을지라도, 그것은 결국 초기의 시편에서 잦게 출현하던 어머니를 찾아가기 위한 우회로에 마련된 전략적 대상물이었을 뿐이다. 그에게는 전란이라는 비극상조차 궁극의 여성적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소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일러서 전후시의 비인간적 경향을 수용했거나, 실존적 존재의 의미를 탐색했다고 별명할지라도, 그것은 어머니를 찾으며 종료하게 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차이가 없다. 최승렬에게 자연은 어머니요, 어머니는 곧 자연이었던 셈이다.

최승렬 시의 형식적 특징은 감정의 절제와 언어의 조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예컨대, 그는 새봄의 기운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해서 소리 외의 움직임을 고의로 사상하여 감각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또 그는 시의 여백 효과를 충분히 살리기 위해 불필요한 언어들을 과감히 삭제해버린다. 이런 노력들은 그의 성품을 닮은 것일 테지만, 전쟁 후의 산란한 마음들을 위로하기에 알맞다. 도처에서 분출하는 소란한 소리는 전후의 일반적인 풍경이거니와 이런 상황에서 시가 담당할 수 있는 최우선적 기능은 위안일 터이다. 그는 이처럼 시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전원의 아름다움을 집요하게 시화한 이면에는 전쟁으로 인해 피멍든 가슴을 치유하려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 점은 그의 시가 획득할 수 있는 시사적 의의이다.

1950년대 전북의 문단을 빛내던 그는 1957년 초에 인천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그는 제물포고등학교와 대건고등학교를 거쳐 신명여자고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교육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동안에 시집, 국어 연구서 등을 출판하며 고향을 그리워하였다. 이런 연유로 그는 전북문학사에서 출향 인사로 분류되어 논의선 밖에 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작품들은 사장된 채, 지금껏 변변히 거론되지 않는 실정이다. 그 원인들 중에서 그의 결벽에 가까운 성품 탓이 크다. 그는 '소년시집'이라 불리우는 '푸른 눈동자에 그린 그림'(익문사·1975)의 머리말에서 '스스로 사람들 틈에 끼어 법석대기를 꺼리는 성미라 홀로 초야에 묻혔다'고 고백한 것처럼,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여 문단 활동을 삼갔다. 그가 좀더 폭넓게 교유하고 활동했었더라면, 도내 문단에 끼친 영향은 더욱 확대되었을 것이다. 이 점은 그가 최근까지 활약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전기적 이력조차 온전하게 재구성하기 힘들도록 만든 요인이다. 그의 시적 성과에 관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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