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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보다 영화 많이 본 사람 나와!"
"우리보다 영화 많이 본 사람 나와!"
  • 김정엽
  • 승인 2013.04.23 2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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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가족(기술팀) vs 조용한 가족(자막팀)

영화를 본다. 이 행위는 분명 관객들에게는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같은 영화를 수 십번 본다면? 십중팔구 졸음과 사투를 벌여야 할 것이다. 특히 취향이 아닌 영화라면 더욱 고역이다. 그래도 끝까지 다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초 단위로 끊어서. 음지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소화하고 있는 제14회 전주국제영화제 기술팀과 자막팀이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는 영화제 내내 베일에 싸여있다. 좀 더 잔인하게 이야기하면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들이 없다면? 영화제는 사건사고에 시달릴 것이다.

■ ‘어둠의 가족’ 기술팀

기술팀은 자신들을 ‘어둠의 가족’이라고 자학(?)했다. 그럴 만도 하다. 이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빛을 볼 일이 없다. 하나는 진짜 어두운 곳에서만 일을 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엔딩 크레딧에 이들의 이름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기 때문. 그래서 은막에 잠시라도 이름이 나오는 자막팀이 조금은 부럽다. 하지만 “자막 없는 영화는 볼 수 있어도 영사기 없는 영화는 못 본다”라는 말처럼 기술팀 없으면 영화제 안 굴러간다.

기술팀의 첫 번째 미션은 작품이 결정된 뒤 상영에 앞서 기술적인 문제점을 체크하는 것. 수백만 컷이 넘는 아날로그 필름들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다 보면 “눈알이 튀어나온다”. 또 여러 포맷들의 상영작들이 원활이 돌아가는지 예측을 하고 영화관 여건에 맞게 여러 가지 변수들을 제거한다. 영화제 기간에도 수시로 테스트를 진행하는 것은 기본. 필름으로 만든 영화의 경우 손을 이용해 실제 상영해보고 얻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관객들에게 최상의 상영 여건을 제공한다. 이쯤 되면 영화는 ‘감상’이 아닌 ‘숨은 오류 찾기’가 된다.

이 때문에 기술팀의 조미혜(31)씨는 “자신의 열정이 최고의 스펙”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는 ‘생의 감각’ 등 3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한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부산이 고향이지만 전주영화제의 매력에 빠져 이곳에 왔다. 벌써 6년째다. 조씨는 “감독을 하면서 전체적인 틀을 꿰뚫어 보는 게 힘들었지만 영화제의 전반적인 상황을 지켜보며 감독으로서 역량을 더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전공은 자원에너지공학. 현재 직업은 곶감 회사의 유통직. 정말 영화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남자 정철(29)씨. 그는 “전공도 직업도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직접 필름을 만지고 겪어보는 것들이 재미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영화제가 끝나면 여행을 가고 싶다던 이들이 있어 전주국제영화제는 ‘이상 무’. 

■ ‘조용한 가족’ 자막팀

자막팀 사정은 좀 낫다. 영화 마지막에 올라오는 엔딩 크레딧에 이름이 나오고 기술팀이 그토록 갈망하는 햇빛도 본다. 하지만 사무실 분위기는 ‘절간’을 방불케 한다. 많게는 4시간 가까이 되는 영화를 뚫어지게 봐야 하는 것은 기본. 수 십번 반복해서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모조리 체크해야 한다. 같은 팀원들과 나누는 말보다 영화 주인공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업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자막팀이 ‘조용한 가족’인 이유다.

자막팀의 업무는 기본적으로 ‘스포터’, ‘오퍼레이터’ 두 가지로 나뉜다. 음성에 맞게 자막의 길이를 잡아주는 게 ‘스포터’, 영화관에서 영상을 상영할 때 프로젝터를 통해 자막을 함께 상영하는 게 오퍼레이터다. 보통 자막이라 하면 번역까지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번역은 따로 한다. 하지만 영어 등 외국어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문장 단위로 끊거나 배우들이 말하는 뉘앙스를 자연스럽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

자막팀은 대체로 대사가 많지 않은 영화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대사가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마저 피할 수는 없다. 가장 힘든 점은 배우들의 말이 서로 빠르게 교차하는 부분이다. 수 백번을 돌려봐도 알기가 어렵다고. 자막팀원들은 배우들의 입만 바라보며 외롭게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간다.

자막팀은 영화 내용을 거의 외울 만큼 자신이 자막을 단 영화에 자부심이 강하다. 인천에서 인권을 주제로 한 극단을 운영하고 있는 자막팀 남윤호(30)씨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처음이다. 국문학을 전공해 아이들에게 논술을 무료로 지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자막을 단 영화 ‘하랄 정육점(HALAL BUTCHER SHOP)’을 ‘강추’했다. 남씨는 “영화제 준비로 전주의 참 맛을 즐기지 못했는데 영화제가 끝나면 전주의 볼거리 먹을거리를 찾아 맘껏 즐기겠다”고 말했다.

“관객보다 먼저보고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메신저”라고 자신을 소개한 자막팀 이지현(25)씨는 ‘묻지마 사랑(BLINDLY IN LOVE)’을 추천했다. “20대 중반의 팔팔한 청춘답게 사랑영화를 추천했지만 그렇다고 ‘묻지마 자막’은 달면 안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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