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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이 시대를 주목한다
지금 여기 이 시대를 주목한다
  • 이화정
  • 승인 2013.04.23 2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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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전주국제영화제의 영화는 대개 불편해도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가학적 취미가 있는 유능한 애인 같다. 불편하지만 결코 떠나버릴 수 없는.

불편한 이유는 이렇다. 영화는 한 번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보지 못한 계층의 육성을 다룬다. 휴머니즘의 필터로 걸러진 얌전한 대상이 아니라, 핏발 선 눈으로 카메라 렌즈를 째려보는 그런 이들에게, 희망은 없어도 썩은 제도의 심장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는 투박한 미학에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그러나 전주국제영화제는 더 넓은 저항과 연대의 지평으로 나가는 출구의 영화들로 변화의 출발점을 삼았다. 쉽게 말해,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 없었다는 영화감독은 물론 영화평론가들의 권유에 약간 몸을 움직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전주영화제는 진화한다. 올해 초청된 영화는 46개국 190편(장편 120편‧단편 70편). 첫 번째 징후는 영화와 문학의 만남이다. 영화가 한 장면과 삶을 접속시켜 풀어가듯 문학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삶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소설가 김영하의 단편소설 3편을 이상우‧이진우‧박진성과 박진석 감독이 완성한 ‘숏!숏!숏! 2013’은 역대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기획으로 거듭났다. 카프카 탄생 130주년을 맞아 기획한 ‘카프카 특별전’에서는 인간과 삶에 대한 끝없는 절망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또 다른 영화를 선물한다.

두 번째 징후는 ‘Her stories’다. 개막작 ‘폭스 파이어(FOXFIRE)’와 폐막작 ‘와즈다(WADJDA)’가 공교롭게도 ‘소녀 시대’의 성장기를 다뤘다. ‘클래스’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2008)을 받은 프랑스 로랑 캉테 감독의 ‘폭스 파이어’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성폭력을 경험한 뒤 피멍 든 소녀들이 세상과 맞서는 것으로 조이스 캐롤 오츠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와즈다’는 또래 남자 아이들처럼 자전거 살 돈을 구하기 위해 이슬람 경전인 코란 암송 대회에 나가는 것을 그린다.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여성 감독 하이파 만 알수르의 첫 장편영화.

세 번째 징후는 국제영화제 위상에 부합되는 규모의 상금 인상이다. 앞으로 세계 영화계를 책임질 신인 감독들의 발전 가능성을 미리 엿보는 ‘국제경쟁’ 중에서 1편을 선택해 전북대가 수여하는 ‘전대상’(대상·상금 2000만원)이 신설됐다. 국제경쟁·한국경쟁에 선정된 한국영화 1편에 전용관 개봉(2주 이상)·홍보마케팅비 2000만원을 지원하는 ‘CGV무비꼴라쥬상’은 현금 1000만원과 차기 작품을 위한 기획개발비로 1000만원을 추가로 지급된다.

네 번째 징후는 스타들의 방문이다. 국제경쟁 심사위원으로 배우 정우성과 류승완 감독은 낯이 익고, 개막작에서 여주인공을 맡은 ‘2012 산세바스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케이티 코시니가 로랑 캉테 감독과 방한한다.

한 시대란 수많은 자발적 노력과 다가와 부딪치는 우연이 덩어리를 이루며 만들어낸 산물이다. 과거를 복원하려는 복고주의가 때로는 공허한 이유는 그 시절을 만들어냈던 여러 요인들을 다시 갖출 수 없는 상황에서 그저 “돌아가자”고만 외치기 때문이다. 아울러 과거 역시 불안정한 상태였고, 또 현재란 그 과거가 도달하려고 애썼던 분투의 산물이란 걸 잊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곳은 언제나 바로 지금 이 자리다. 올해 JIFF는 그래서 바로 여기, 지금 이 시대의 영화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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