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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정
  • 승인 2013.04.23 2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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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수석 프로그래머

흔히 역사 속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가해자, 피해자, 수혜자. 그런데 문제는 피해자는 늘 선명하지만 가해자와 수혜자는 불분명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상처 입은 전주영화제를 세상은 지우고 있었고, 말끔히 지워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이런 불편함을 안고 등장한 김영진 수석 프로그래머와 이상용 프로그래머.

제14회 전주국제영화제를 앞두고 만난 이들은 다크 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표정이었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일로 김영진 프로그래머는 핼쑥해졌고, 이상용 프로그래머도 거의 잠을 못잔 얼굴로 나타났다.

3번의 만류 끝에 난생 처음 프로그래머를 맡게 된 김 프로그래머는 “너무 쉽게 생각했다”고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이상용 프로그래머가 안 왔으면 대재앙이었을 것”이라고 했을 만큼 이 프로그래머는 온전히 영화제에 매달렸다. 스태프들로부터 역대 프로그래머 중 사이가 제일 좋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이 일치한 데다 일을 추진하는 방식에서도 충돌되는 지점이 이상하리만큼 거의 없었다.

올해 예년과 비슷하게 46개국 190편이 초청되기까지 이들의 협업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됐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치여 기를 펴지 못한 한국영화는 김 프로그래머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비아시아 영화는 이 프로그래머가 주로 맡았다. 그러나 영화를 서로 엄밀하게 나누기 보다는 뒤섞여 생각한 것들이 많았고, 대화를 통해 조율해나간 편이다.

일부 섹션은 교통정리를 했다. ‘경쟁 부문’, ‘지프 프로젝트’, ‘시네마 스케이프’, ‘영화보다 낯선’, ‘시네마 페스트’, ‘포커스 온’ 등 6개 섹션은 그대로 유지하되 19개 하위 섹션은 11개로 통합시켰다. “난해한 영화도 많은데, 섹션도 너무 많아 혼돈스럽다”는 관객들의 오랜 불만을 감안한 것.

이들의 렌즈를 통과하고 난 초청작들에 관한 대강의 평가는 어떨까. 올해 초청작들에 대해 논하려면 이전 영화제 평가에 대한 언급이 필연적이다. 전주영화제는 줄곧 “다른 영화제에서는 감히 초청하기 힘든 영화들을 기꺼이 틀어주는 실험적인 장”이라는 평가와 “영화감독‧평론가들마저 이해하기 어려운 취향의 장”이라는 평가가 공존하며 성장해왔다.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보였던 곳에 다리를 놓겠다고 작정한 두 프로그래머는 “전주영화제의 새로운 화법과 소재가 주는 아주 희소한 맛을 주는 영화는 선택하되 대중적인 영화들도 껴안기 위해 신경썼다”고 밝혔다. 김 프로그래머는 “지나치게 ‘아방가르드’(Avant-garde)한 영화들이 많아지면 영화제가 ‘게토(ghetto)화’ 될 수 있다”고 경계했고, 이 프로그래머는 “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영화제가 축제이다 보니까 영화계에 파장을 일으킬 만한 이야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쪽으로 설득했다. ‘코리안 시네마 스케이프’에 이미 상영된 한국영화 ‘신세계’ (감독 박훈정), ‘파파로티’(감독 윤종찬), ‘전설의 주먹’(감독 강우석) 등이 걸리게 된 안팎의 사연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파노라마 섹션이 있어요. 여기에 포함된 상영작 덕분에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분위기를 띄워놓습니다. 송강호 이병헌 같은 배우가 나타나면 난리가 나죠. 그러나 전주영화제는 이쪽에 경쟁력이 없었습니다. 올해 신인 감독 대신 중견 감독들을 모아보려고 했으나 잘 안 됐어요.”

그럼에도 김 프로그래머는 “영화의 형식은 늘 새로워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고, 이 프로그래머도 “과거와 비교해 현재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영화들을 중점적으로 봤다”고 덧붙였다. 저예산 상업영화 중 되도록 유명 배우가 나오는 영화는 배제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것. 언뜻 모순 같아 보이는 이 말은 전주영화제에서는 취향에 따라 다양한 메뉴를 갖추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이 프로그래머는 왕성한 잡식성 독서력을 바탕으로 영화와 문학의 만남이라는 역작 기획을 내놓았다. 소설가 김영하와의 친분으로 세 편의 단편소설을 이상우‧이진우‧박진성과 박진석 감독이 엮은 ‘숏!숏!숏! 2013’를 기획했고 “역대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자신하면서도 참여 감독들에게 미안해했다. “‘숏!숏!숏! 2013’에 참여한 감독들에게 각각 1000만원 씩 지원되지만, 감독들이 다 빚져서 만든 영화”여서다. ‘포커스 온’에 마련된 ‘카프카 특별전’ 역시 소설과 영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영역임을 확인시켜 준 버전 업(version-up)된 오늘·여기, 우리의 지형도를 확인시켜준다.

올해 전주영화제의 경향이 모든 시네필의 박수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예산 축소, 시간 제약, 새로운 조직 등과 같은 울퉁불퉁한 장애물 사이에서 곡예를 벌인 전주영화제는 그러나 뒷걸음치지는 않을 것 같다. 프로그래머들의 성실성과 견고하게 단련된 예술적 체력이 전주영화제의 방패 역할을 하고 있어서다. 늘 그렇듯 마니아 관객들은 이번에도 한 수 배운다는 느낌으로 헤어지게 될 것이다. 지금껏 전주영화제에 그토록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찾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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