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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대표 후보선수단 맡은 익산출신 양영자 감독
청소년대표 후보선수단 맡은 익산출신 양영자 감독
  • 김은정
  • 승인 2013.10.17 2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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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탁구로 얻은 영광, 이제 후진양성으로 보답"
▲ 88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한국탁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양영자 감독이 은퇴 후 몽골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귀국, 25년만에 지도자로 복귀했다. 인터뷰를 마친 양 감독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한체육회 앞을 지나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올해 초 전북일보가 펴낸 사진집 '기억'에서 청춘의 그를 만났다. '기억'은 1950년대부터 오늘을 잇는 전북의 60년 현대사에 놓인 풍경이다. 잊고 싶거나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을 되살리는 사진의 힘은 사진가 정주하의 표현처럼 '자화(自話)하는 역사'로서의 의미에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은 50년대, 궁핍했던 60년대, 산업화에 눈떴던 70년대, 민주항쟁의 80년대, 변방으로 밀려난 90년대, 가능성과 희망의 2000년대가 고스란히 담긴 그 사진집에서 만난 흑백 사진 한 장. 앳되어 보이는 짧은 커트머리의 그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탁구 국가대표 선수 양영자다. 그가 우리에게 주었던 기쁨과 환호의 순간이 그리웠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온 국민을 열광케 했던 그 순간은 벌써 25년, 사반세기를 넘는 과거의 시간이 되어 있다. 그렇고 보면 20대의 빛나는 청춘, 녹색테이블 앞에서 온 국민을 환호하게 했던, '씨'나 '선수'를 붙이지 않고 그냥 우리들의 '양영자'로 불렸던 그의 이름이 '기억'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였다.

우리나라 탁구 중흥기를 열었던 그를 만났다. 은퇴한지 25년, 양영자 청소년국가대표 후보선수단 감독(49)은 조금 낯설었다. 운동선수답지 않은(?) 차분한 성품 때문이기도 했다. 인터뷰 내내 조용조용한 대화를 나누는 그를 보며 문득, 88서울올림픽 탁구 여자 복식 결승전에서 중국을 제치고 금메달을 안았던 순간에도 결코 요란하지 않았던 그의 승리 세러모니가 생각났다.

89년 은퇴한 이후, 남편과 함께 몽골과 중국에서 선교활동으로 개인적인 삶을 지켜왔던 그는 올해 초에 귀국, 지난 7월부터 국가대표 후보 선수단 감독으로 복귀했다. 지난해 런던올림픽에서 SBS해설가로 데뷔, 단절되었던 거리를 좁히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지만 탁구현장에서 지도자로 시작하는 그의 의지는 더 특별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의 탁구는 그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80년대의 상황과 맞닿아 있지 않다. 더 이상 인기 종목의 대열에 끼지 못한 현실도 그렇거니와 새로운 '스타 선수'의 귀환도 먼 이야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한국 탁구가 80년대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는 희망이 있는가"를 물었더니 한참을 생각하다가 "한때 국제무대를 석권했던 유럽 국가들의 추락을 한국이 절대 걷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유럽처럼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일본처럼 10년 앞을 내다보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의 새로운 목표가 분명해보였다. 한국 탁구의 80년대 영광을 다시 찾는 일에 이제 그가 나섰다.

-언제 귀국하셨습니까. 몽골과 중국에서만 14년 생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작년 3월에 들어왔습니다. 청소년 지도하는 일은 7월부터 시작했는데, 워낙 외국생활을 길게 한 터여서 아직 일상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여자 복식 금메달을 딴 이듬해 은퇴했으니 25년 만에 현장으로 돌아온 셈이군요.

"벌써 그렇게 되었더라고요. 선교활동도 탁구를 가르치는 일로 해왔으니 탁구선수 출신으로서의 삶을 그대로 유지해온 셈이지만 의미는 많이 다르지요."

-현역 선수로 은퇴하더라도 대부분 지도자로서의 길을 오랫동안 걷는데, 바로 체육계를 떠났던 이유가 있었습니까.

"저도 코치 생활을 1년 남짓 했었어요. 그런데 건강이 좋지 않아 접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신학공부를 시작했어요. 덕분에 선교사의 길을 택한 남편을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선교활동이 삶의 중심에 들어서게 됐죠."

-국가대표로 활동했던 시절에도 건강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은퇴 결정도 결국 건강 때문이었겠군요.

"간염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가족력까지 있어서 관리를 잘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운동은 결국 훈련이 답인데, 간 건강은 절대 무리하면 안 되거든요. 병원에서 탁구 하는 것을 말릴 정도로 심각했었죠. 고통과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88올림픽때 뛸 수 있었던 것도 기적이었죠."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겠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을 갖지 않았으면 그 시절을 온전히 선수로 남아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신앙의 길을 걷게 된 좀 더 뚜렷한 배경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몽골에서 선교활동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몽골은 우리처럼 분단된 나라입니다. 외몽골과 내몽골로 갈라져 있지요. 몽골은 구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지만 90년대에 들어서 체제를 바꾸어 개방외교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막 개방된 사회적 분위기에서 국민들이 겪을 정신적 공황을 짐작할 수 있었지요. 이런 시기에 선교가 절실히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몽골어는 한국어와 많이 다르지만 어순이 같아 언어를 익히는데도 그리 어렵지 않겠다 싶었죠. 지금은 소통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언어는 익숙해졌습니다."

-선교를 위해 가족이 모두 들어갔는데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나요.

"분명한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그때 아이들이 네 살 다섯 살이었는데, 겨울이 길어 추운 날이 너무 오래 지속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몽골 주식이 육식이다 보니 채식을 하는 저로서는 식생활 불편을 감수해야 했던 정도지요."

-돌아오셔서 마주한 한국 탁구 현실은 어떻게 보십니까. 80년대와 90년대에 비해 많이 위축되어 있지 않나요.

"안타까운 현실이죠. 특히 여자탁구는 이전의 생기를 찾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제가 맡은 일도 '드림팀'이라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아이들을 우수한 선수로 키워내는 일입니다. 남자와 여자 10명씩을 선발했는데, 저는 여자팀을 맡게 되었지요. 앞으로 4년 동안 전념해야 할 일입니다."

-인기종목으로부터 멀어진 탁구의 현실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그대로 반영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동네마다 있었던 탁구장이 요즈음은 찾아보기 어려워졌죠. 국민적 열광이 없어진 종목이 안게 된 현실이겠죠.

"그래도 다행인 것은 생활체육으로 붐이 일고 있고, 실제로 생활체육현장의 탁구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증거겠지요."

-한때 세계 1위인 중국을 위협했을 정도로 우세했던 한국 탁구가 왜 이런 상황이 된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세대교체를 이루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에는 중국에 이어 한국이었는데 지금은 일본이 앞서 있는 형국이거든요. 들여다보면 일본은 이미 오래전에 세대교체를 위한 정책을 실행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선수를 선발해 키워내면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를 이루었죠. 10년 앞을 내다보고 준비를 했으니 그렇지 못한 한국은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의 스타들이 여전히 현장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신진 선수 발굴이 안 되고 있다는 증거겠군요.

"남자 국가대표 선수들만 봐도 연령대가 30대를 훌쩍 넘습니다. 문제는 그 선수들을 능가할만한 선수들이 안 나오는 것이고, 그렇다보니 이들이 계속 현장에서 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은퇴도 마음대로 못하는 현실인겁니다."

-세대교체가 되면 잠깐 동안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멀리 내다보면 보다 과감한 선택이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작년 올림픽만 해도 남자선수들이 은메달을 땄습니다. 당장 메달 하나 더 따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죠. 그런데 그것에만 매이다 보면 과감하게 세대교체를 못하게 됩니다. 문제는 당장 코앞의 성과를 선택하느냐, 아니면 장기적인 미래를 선택하느냐 인데, 우리의 경우는 그 선택의 결과가 지금 드러나고 있는 셈입니다."

-한국 탁구는 80년대와 90년대가 절정기였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때는 기량 있는 선수들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 대회가 많이 있을 텐데요.

"86아시안게임과 87세계선수권대회, 88올림픽이 저에게는 가장 소중한 기억입니다. 그중에서도 잊지 못할 순간들이 몇몇 있는데, 87세계선수권대회 단식 준결승은 제 생애에 가장 극적인 대회였습니다."

-그때 금메달은 놓치지 않았나요.

"개인 단식에서는 항상 은메달에 머물렀어요.(웃음) 그때 준결승에 중국선수와 붙었는데 2대 2, 마지막 세트에서 18대 11로 제가 지고 있었는데 상대방 점수를 그대로 묶어놓고 내리 10점을 선점했어요. 역전승이었죠."

-어느 경기나 마찬가지겠지만 탁구는 특히 민첩하게 상대방의 전략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요. 그만큼 심리전 성격이 강할 것 같은데요.

"정신력이 중요하죠. 사실 18대 11의 상황이라면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기 마련인데, 그때 도 욕심을 버리고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담담하게 한걸음씩 나갔던 것 같아요. 역전승이 현실이 되었을 때 기쁨은 정말 컸죠."

-건강이 안 좋은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늘 경기 성과는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충분한 훈련을 하신 덕분이겠죠.

"아쉽게도 경기 때마다 충분한 훈련을 못했습니다. 몸이 아파서 훈련의 양이 언제나 부족했어요. 그래서 항상 불안했습니다. 믿음이 없었으면 그런 상황을 이겨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탁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양감독의 모교인 익산 이일여중과 이일여고가 탁구명문으로 이름났었죠.

"우연히 탁구를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야외수업을 했는데, 미술시간이었죠. 그런데 제가 그림은 그리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애들 그림만 기웃거리고 다니는 것을 선생님이 보신 거예요. 그때 마침 탁구부가 만들어지는 때였는데, 선생님이 권유하시더라고요. 별 고민도 없이 탁구부에 들어갔죠. 이일여중과 이일여고 탁구부도 우리들이 입학하면서 생겼습니다."

-선생님께서 양감독의 신체조건과 민첩함을 읽어내셨던거군요. 일찍부터 운동부에서 활동하셔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중고등학교를 탁구선수로만 보냈으니 아무래도 그렇죠. 그래도 어릴 때 놀러 다녔던 배산 이라든가 창인동 골목길의 추억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함께 뛰었던 선수들 중에서는 누가 가장 친분이 깊었나요.

"역시 88올림픽에서 콤비를 이루었던 현정화 선수죠. 저보다 나이가 다섯 살 아래지만 후배이자 동료로 서로 의지하고 존중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상하게 같은 연배의 선수는 없었네요."

-탁구가 88올림픽 때부터 정식 종목으로 되었더군요. 아까 말씀 하신대로 오늘날의 탁구는 경기로서 비인기종목이지만 근래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생활체육으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탁구는 민첩한 운동이에요. 작은 공간에서 할 수 있고, 다른 어떤 운동보다도 기구도 비싸지 않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죠. 특히 크게 체력을 소비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전신운동이 되는 매력 있는 운동입니다. 상대가 있으니 경기하는 재미도 있고요. 그래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일상 속의 운동으로도 권할 수 있는 종목이지요."

-다른 운동은 안하시나요.

"걷기 이외에 다른 운동은 안합니다. 골프를 해보았는데, 죽어 있는 볼을 치는 과정에 흥미를 못느끼겠더라구요. 탁구는 살아 있는 볼을 주고받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굉장히 역동적이고 재미있죠. 골프 치는 분들은 다른 입장이겠지만요.(웃음)"

-탁구 분야의 상황이 녹록하지만은 않지만 머지않아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습니다. 그만큼 양감독님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의지는 있지만, 결과를 지금부터 재단하고 싶진 않습니다. 성실하게 제 맡은 역할을 해나갈겁니다. 선수들의 재능을 발견하는 일이 우선이겠고, 그 재능을 잘 살려서 좋은 선수로 키워내는 것이 그 다음 목표겠지요. 앞으로의 4년이 제 인생에서도 아주 중요한 시기가 될 겁니다."

양감독은 오는 11월부터 초등학생과 중학생 꿈나무 지도를 시작한다. 충북 단양에 있는 훈련 전용 탁구체육관에서 합숙훈련으로 진행하는 고단한 과정이다. 드림팀으로 선발된 10명 여자아이들 못지않게 그 역시 마음이 설렌다. 건강이 최악의 상황을 맞았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쏟았던 탁구 열정을 이제 후진들을 위해 쏟을 시간이 그의 앞에 놓여있다. 한국 탁구가 다시 세계의 녹색테이블을 석권할 날을 준비하는 여정의 시작이다.

● 양영자 감독은
- 스카이서브 처음 개발…11월부터 충북서 꿈나무 지도

양영자 감독은 전북 익산이 고향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탁구부에서 라켓을 잡기 시작했다.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와 정현숙선수가 최초로 단체전 우승을 하면서 탁구 열풍이 막 불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10대와 20대,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0여년을 국가대표 선수로 보냈다.

팔꿈치 부상을 당했던 대학시절에 고비를 맞았었고, 이어진 간염 투병으로 탁구선수 인생 중단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 때마다 신앙의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 국가대표에서 탈락되는 아픔을 맛보기도 했던 그는 86 서울 아시안게임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중국선수를 이기고 은메달을 따 화려하게 컴백했다.

86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 87 세계탁구선수권 복식 금메달과 단식 은메달에 이어 88올림픽에서는 현정화 선수와 콤비를 이뤄 중국을 제치고 복식 금메달을 따 국민의 영웅(?)이 됐다. 다섯 살 아래인 현정화 선수는 피할 수 없는 라이벌이기도 했지만 지금도 '같은 길을 가는 인생의 최고 파트너'로 꼽는 동료이기도하다.

그는 당시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탁구공을 높이 올리는 '스카이브 서브'를 처음 개발해 화제가 됐다. 그의 강공 드라이브와 스카이브 서브는 상대 선수들을 위협하는 주특기였는데, 특히 그의 강력한 드라이브에 온 국민이 환호했다.

88올림픽 직후 간염으로 건강이 악화돼 이듬해에 은퇴했으며, 그 무렵 어머니가 간암으로 작고해 우울한 시기를 보냈다. 신학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는데, 1992년에는 연합통신 기자 출신으로 선교사의 길을 가고자 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모든 삶을 선교에 바쳐온 그는 1997년 몽골로 건너가 14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남편은 교회개척과 성경 번역으로, 양감독은 몽골의 탁구클럽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며 선교활동을 했다. 지난해에 사역을 마치고 올해 초 귀국했으며, 지난 7월 청소년국가대표 후보선수단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20년여 만에 복귀했다.

지금이 한국탁구가 다시 일어서는 전환점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유망주를 발굴해 하루라도 빨리 세대교체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탁구로 얻은 자신의 영광을 후진들을 위해 쏟겠다는 의지는 그래서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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