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이 사람의 풍경
일제 침탈 사료 찾기 나선 군산 동국사 주지 종걸 스님"일본 역사왜곡·망언…자료수집 중단할 수 없는 큰 이유"
김은정  |  kimej@jjan.kr / 등록일 : 2014.03.05  / 최종수정 : 2014.03.05  22:19:05
   
▲ 종걸스님은 동국사 역사를 추적하다가 일제 침탈사료에 관심을 갖게 됐다.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수집한 사료는 5000여점. 자료를 수집하다보면 일제강점기 사료 뿐 아니라 귀한 지역사 관련 자료를 만나게 된다. 인터뷰가 있던 날, 동국사를 들른 전북도립미술관 이흥재 관장에게 스님이 새로운 사료를 설명하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지난 설 연휴, 근대문화유산이자 국가등록문화재인 군산의 사찰 동국사가 빗장을 걸었다. 절집 문을 연지 100년여 만에 처음이었다. ‘내막가거 왕막가추(來莫可拒 往莫可追 )’. 사람을 피해 산속 깊이 들어가 살았던 9세기 선승 법상(法常)도 문하에 들고자 몰려오는 수많은 제자들을 내치지 않고 ‘들어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붙잡지 말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산문을 폐쇄했다면 예삿일이 아니다. 평일이면 300~400명, 주말에는 1000명도 넘게 들른다는 이곳 동국사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때마침 설 연휴를 맞아 찾아왔던 수천 명 관광객들이 되돌아가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어려움에 처한 것은 절집뿐만이 아니었다. 근대문화유산 도시로 관광의 이미지를 높이겠다는 정책이 무색해지면서 더 난감해진 것은 군산시였다.

사실 동국사의 산문 폐쇄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절집 시설은 훼손되고 쓰레기는 쌓였다. 국가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보호도 낙관할 수 없게 됐다. 동국사는 관리의 어려움을 시에 호소했지만 묵묵대답이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산문 폐쇄는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던 셈이다.

“더 이상 관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니 산문을 닫는 것 밖에 답이 없었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동국사를 여러 해 째 홀로 지켜온 종걸스님의 결의는 단호했다. 그러나 빗장을 건지 5일이 채 안되어 산문은 열렸다. 시가 대책 마련에 나선 덕분이기도 하지만, 이어지는 관광객들의 걸음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국사는 왜 주목받는 사찰이 된 것일까. 동국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세웠던 500여개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이다. 일본의 조동종(曹洞宗) 사찰로 지어져 해방이 되자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되었다가 조계종 선운사의 말사로 등록됐다. 외관 장식이 없고 창문이 많은 대웅전은 건축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동국사의 이력은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동국사의 이력이 새롭게 더해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자료가 발굴되고 내용이 공개되는 과정에서 일제 침탈 자료 수천점이 수집됐다. 그만큼 침탈의 역사는 더 명료해졌다. 학계도 주목하게 된 이 역사의 기록을 찾아내고 정리해 일제 침탈의 역사를 우리 앞에 내놓은 사람은 놀랍게도 역사학자가 아닌 동국사 주지 종걸스님이다.

인터뷰가 있던 날, 스님에게 보내온 택배상자가 있었다. 그 안에서 보은감사(報恩感謝)라고 새겨진 도시락이며 일장기, 수공예품 등이 쏟아졌다. 모두가 일제강점기 자료들이었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던 스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것 참, 이렇게 철저하게 식민사관을 심었으니…. 고작 60년 밖에 안 된 역사인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면 정말 큰일이에요.” 스님의 소리가 높아졌다.

-어디서 온 자료들인가요.

“경매에서 사들인 거예요. 내가 옥션을 하거든…. 옥션 하는 스님은 낯설죠?(웃음) 그런데 할 수 없어요. 자료를 구하려면 이런 통로가 아니면 어렵거든.”

-자료의 진위를 가리는 일이 쉽지 않겠는데요. 인터넷 옥션으로 하시다보면 더 그렇겠구요.

“그래서 경매 현장에 가능하면 직접 갑니다. 자료 내용도 꼼꼼히 보고 제대로 된 자료를 가릴 수 있으니까요. 그동안 많은 자료를 접하다보니 이제 눈에 들어와요. 가치가 있는 자료인지 진품인지.”

-수집한 일제강점기 자료들이 꽤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 많은 자료를 모으신 건가요.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 중 일제강점기 것만 5천점 정도 되는데 침탈사 관련해서는 양적으로도 그렇지만 꽤 의미 있는 사료들이죠. 그중에는 일본 아오모리현의 조동종 운상사 주지인 이치노헤 쇼코 스님이 보내준 사료도 적지 않습니다.”

-이치노헤 스님은 지난해 ‘조선 침략 참회기’란 책을 내셨죠. 조동종이 일본의 조선 침략과 조선인 황민화 정책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했는지를 낱낱이 드러내는 이 책의 내용을 보고 스님의 용기에 감동 받았습니다. 스님과의 인연이 궁금하군요.

“동국사 역사를 추적하다가 일본 조동종을 알게 되었어요. 일제강점기 침탈 사료를 수집하다보니 연구자들과도 교류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이기도 한 스님을 소개받게 되었지요. 스님은 저의 일제자료 수집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어요. 일본에는 아직도 그런 자료가 많이 있어서 뜻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거든요.”

-2012년 동국사에 참사문비를 건립한 것도 그런 인연 덕분이었겠군요.

“일본 불교의 종파인 조동종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이치노헤 스님은 자신이 속한 조동종의 그러한 과거 역사를 검증하고 사죄하는 일을 해왔죠. 중국과 우리나라를 답사하고 ‘조동종의 전쟁’ ‘조동종은 조선에서 무엇을 했는가’란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스님이 해온 일을 들여다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 스님을 만나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동국사로서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동국사에 세워진 참사문비를 보면 침탈을 사죄하는 내용이 절절하던데요. 그 참사문이 20년 전에 조동종 종무총장의 이름으로 발표된 공식 문서라면서요.

“이치노헤 스님도 그 문서를 보고 일본 불교가 본연의 자리에서 벗어나 침탈에 가담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저도 동국사의 이력을 찾다가 그 내용을 알게 되었는데,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까지 만들어 큰 힘을 주는 이치노헤 스님께 그 참사문을 새겨 동국사에 건립하는 것을 제안해 참사문비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제막식에는 양심 있는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도 참가했었는데, 지금 일본에서는 그것 때문에 스님이 곤욕을 치르고 있어요. 조동종 본부에서 참사문비 철거를 요구하고 있거든요.”

-아베 신조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하겠죠. 일본 우익세력의 준동도 이제 도를 넘어선 것 같던데 이치노헤 스님 같은 분들이 겪을 고통을 짐작할만합니다.

“그렇지만 스님은 웬만한 압력과 협박에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작년 부산에 갔을 때는 일본 영사관 관계자로부터 한국입국이 제한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지만 스님의 의지는 더 결연해졌어요. 저도 스님 덕분에 일제의 조선침탈 뿐 아니라 중국침탈에도 눈을 뜨게 되어 해마다 남경학살 추모식에도 동행합니다.”

-스님은 어떻게 일제침탈의 역사에 주목하게 되었습니까.

“제가 동국사에 온 것이 2005년입니다. 그해에 대웅전 남쪽 범종 명문을 탁본했는데, 내용을 보니 단재 신채호 선생이 떠오르더군요.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셨잖아요. 과거역사라고 해봤자 고작 60여년 지난 일인데, 이 사찰이 누가 언제 창건했는지, 주지는 누가 거쳐 갔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는 거예요. 한 줄의 글도, 한 장의 사진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 저를 움직이게 했지요. 일본 사찰로는 유일하게 남은 이 절을 통해 일제 식민지 역사를 후손들에게 알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것만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동국사의 의무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자료 수집에 나섰어요.”

-불과 60여 년 전 역사라고는 하지만 자료 찾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실제 전국을 다니면서 보니 대부분 훼손되었거나 멸실되었더군요. 특히 전라북도 안에는 일제 사료가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는데, 일본에는 자료를 구할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긴 하지만 드나들기도 쉽지 않고 경비도 부담이 되었어요. 그래도 힘닿는 데까지 하나씩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전북에 일제 강점기의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군산을 비롯해 수탈의 기지였던 전북이야말로 자료가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은데요.

“저도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더군요. 해방되던 해에 전북에서 모든 자료를 15일 동안 소각했다는 기록을 ‘철수작전’이란 일본 자료에서 보았습니다. 공장과 관공서 소각장에서 태웠는데, 일주일동안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을 정도로 많은 양을 태웠다고 합니다. 당시 도청의 국장급 정도 되는 일본인 관료가 진행한 일인데, 이 사람이 각 시군에 자료를 다 태우라고 지시를 내렸더군요. 전북에 유독 남아 있는 자료가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인가 싶었죠.”

-그럼에도 스님은 많은 양의 사료를 수집했으니 근대문화유산도시를 표방한 군산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제 침탈사와 관련한 사료로는 가장 많다고 하더군요. 양으로도 그렇지만 질적으로도 괜찮은 사료들이 많습니다. 다만 아직은 개인적으로 수집한 것들이어서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습니다. 사실은 이제 보관의 문제도 심각한 지경이에요.”

-우선은 그렇게 많은 사료를 보관하는 일이 어렵겠는데요. 자치단체나 대학에서 이런 사료들에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이 뜻밖입니다.

“자치단체에 무상기증의 뜻을 밝혔는데 합의되지 못한 조건이 있어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일제 침탈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작은 전시공간을 동국사 근처에 마련되기를 바라거든요. 그래야 동국사가 갖고 있는 상징성, 역사적 의미가 후손들에게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 테니까요. 거창한 박물관 같은 시설이 아니고도 제대로 시설만 갖춘 전시실이면 좋겠어요. 그런데 자치단체로서는 그것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한편에서는 이런 사료들을 특정 종교에 대한 지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지요.”

-연구자들이 주목하고 그 가치를 알게 되면 혹시 다른 지역이나 기관에서 오히려 관심을 갖지 않을까요.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까 걱정도 되는군요.

“올해 성균관대에서 예산을 세워 일부 사료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죠. 사실 사료라는 것이 무조건 수집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어서 그동안 몇 차례 기획전시를 했는데 개인적으로 역부족이었어요. 전시공간이 없어 법당 한쪽에 전시장을 마련했는데 시설은 변변치 않지만 아쉬운 대로 전시는 할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올해는 신사와 군사 자료를 전시합니다. 제 바람은 동국사 근처에 전시실을 마련하는 것이니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지난 설 연휴에 산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여건이 좀 나아졌습니까.

“그런 결정을 내릴 때는 얼마나 답답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겠습니까. 화장실은 시도 때도 없이 고장이 나고 언제 어떤 시설이 훼손될지도 모르겠고, 쓰레기는 쌓이고 도저히 그대로는 안 되겠더군요. 절박한 심경으로 내린 최후통첩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몇 가지 대책을 시가 세운다니 기다려봐야죠.”

-군산은 근대역사문화경관지구까지 조성하면서 근대문화유산의 도시로 가꾸어나가겠다는 정책을 갖고 있는데, 그 상징적 공간인 동국사의 존재를 주목하지 않는 상황은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초 근대역사문화경관지구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참 황당했었어요. 내부적으로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가 중심이 되는 사업이라면 동국사는 중요한 공간이잖아요. 치욕의 역사도 역사입니다. 후손들이 그런 역사를 기억해 오늘의 교훈으로 삼게 하는 일이 필요한 것 아니겠어요.”

-스님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신다고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이 어려운 일을 하면서 일본을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그러니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일본강점기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가 남긴 연설 내용을 보세요. ‘우리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우리(일본)는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조선인은 분열하기 좋아하고 싸우기 좋아하고 이간질하기 좋아한다.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 더 걸릴 것이다.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정말 섬뜩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거기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일본의 아베 총리는 아베 총독의 손자입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군요.

“물론입니다. 지금 드러나고 있는 일본 관료들의 역사관을 보세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망언들은 정말 어처구니없잖아요. 게다가 최근에 있었던 우리의 교과서 왜곡사건은 또 어떻습니까.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식민사관에 물들어 있는 이 치욕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일은 일제강점기 역사를 직시하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실질적인 사료를 찾아 후손들에게 보여주고 깨우쳐주는 일이 중요해요. 제가 사료수집을 중단할 수 없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동국사는 종걸스님을 만나 제 역사를 찾았고, 스님은 동국사를 만나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에 눈을 떴다. 동국사는 조계종 24교구인 선운사의 말사다. 스님이 동국사에 머무를 수 있도록 확정된 시간은 앞으로 3년이다. 그래서 스님은 마음이 조급해진다고 했다. 동국사 근처에 일제 침탈사 전시관을 마련하는 일이 과제로 안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을 바로 세웠으니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스님은 믿고 있다. 그 믿음이 곧 희망이다.

● 종걸 스님은 - 40대에 출가…2005년부터 동국사와 인연

   

종걸스님의 고향은 경남 함양이다. 어린 시절 그는 외갓집에 살았다. 외할아버지는 학문에 관심이 커서 집에 서당을 차리고 선생을 모셔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게 했다. 스님도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어깨너머로 서당공부를 했다. 정자문화가 꽃피었던 함양은 마을 가깝게 흐르는 강위에 정자가 유독 많았으며 강과 정자를 잇는 암벽에는 암각화가 이어졌다.

고향의 풍요로운 문화와 분위기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 같은 또래와 어울리기 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아버지는 ‘과거급제한 집안의 장손’에 대한 교육열이 남달라 중학교 졸업할 즈음 교육을 위해 거창에 살림을 냈다. 기독교 계열의 고등학교를 다녔으나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스님이 되는 길을 선망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출가하여 해인사에서 행자생활을 1년 정도했지만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와 고등학교 학력은 갖추어야 스님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왔다. 그러나 절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시간이 갈수록 요원해졌다.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기업에 취직을 했지만 ‘몽중몽(夢中夢)’이라, 모든 일상의 꿈이 절집에 닿아있었다. 인생에 큰 변곡점은 없었으나 꿈을 꾸어도 절집에 있는 꿈을 꾸었고, 몽상을 해도 산속에서 노는 삶을 상상했다. 속세의 삶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의문이 생겼다. 40대에 출가를 결행했다. 그때서야 집안에서도 ‘진즉 풀어줬어야 할 일이었다’며 받아들여주었다.

중앙승가대학을 거쳤고, 승가대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선운사 내장사를 거쳐 군산 성불사 주지로 있다가 은사인 재훈스님의 뜻을 따라 동국사로 옮겨와 재훈스님이 입적하신 이후 동국사 주지가 되었다.

2005년 동국사와 인연을 맺은 이후 9년. 수행하는 시간 외의 대부분 일상은 일제강점기 역사의 흔적을 좆는 일에 대부분 놓였다. 동국사 역사를 추적하다 발전된 일제침탈사 사료수집은 적지 않은 경비를 필요로 했으나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스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일본의 평화운동가이자 진보적 종교인인 이치노헤 쇼코 스님과의 인연은 역사관을 더 치열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종걸스님이 그동안 수집한 사료는 5000여 점. 절집의 여러 공간을 채우고도 모자라 스님의 방은 간신히 누울 자리만 비워놓고 온갖 사료들이 들어차있다. 그래서 사료 관리하는 일이 점점 더 버거워지지만 사료 수집은 계속할 생각이다. 군산경실련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 저작권자 © 전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김은정의 다른기사 보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1)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강철민
아베신조(安倍晋三)수상은 아마구치 출신이고, 조선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노부유키(阿部 信行)는
성이 다른 사람으로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출신입니다.
아베신조 수상의 외할아버지가 기시노부스케로 전범으로 도쿄재팬에서 사형 되었습니다.

(2014-03-06 17:16:30)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1)
한국지방신문협회
회원사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고충처리인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이메일무단수집거부현재 네이버에서 제공한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54931 전북 전주시 덕진구 기린대로 418(금암동)  |  대표전화 : 063)250-5500  |  팩스 : 063)250-5550, 80, 90
등록번호 : 전북 아 00005  |  발행인 : 서창훈  |  편집인 : 윤석정  |  청소년 보호 책임자 : 김재호
Copyright © 1999 전북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esk@jj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