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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나감에 익숙하기 빗나감을 망각하기
엇나감에 익숙하기 빗나감을 망각하기
  • 기고
  • 승인 2014.09.3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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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진 송광사 주지스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절실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 상황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고, 어떤 이는 현재의 상황이 쉬 잊히지 못하고 오래 지속될 것 같은 불안을 놓아버리지 못한다.

그렇지만, 지속되든 잊혀지든 삶은 새로운 것과의 만남에 연속일 뿐이다.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이를 안다.

이를 두고 인도의 불교사상가 바수반두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 실재한다는 상상이 존재한다. 그 허망분별에는 ‘아’도 ‘법’도 없다”고 했다.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는 것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대상으로 영원할 것 같다는 오해를 만들어가는 일에 불과하다. 무상한 것들에서 영원을 찾으려는 게 인생이다. 그래서 우리가 평생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나의 예상을 빗나간 것들 뿐이다. 그리고 나의 예상과 현실 사이의 엇나감을 심각하지 않게 은연 중에 받아들이는 익숙함에 젖어있다.

인생은 어느 면에서 ‘엇나감에 익숙해지는 것’이고, ‘빗나감을 망각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익숙해지지 못하고 망각하지 못하는 기억은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줄까. 그래서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아무리 많은 날이 지나도 시간의 기억으로부터 당신을 지울 수 없습니다”고 절규했다. 얼마 전 맨하탄의 세계무역센터 테러를 추도하는 자리에서도 한 유가족은 자신의 아픈 기억을 회상하며, “그가 떠나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는 함께했던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그가 살아있습니다. 기억되는 존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그보다 떠나간 그를 사랑합니다”고 했다. 이런 아픈 기억을 잊거나 망각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새로운 것과 연속해서 만나야 하므로, 과거는 익숙해지고 망각돼야 한다. 이상적인 불교인의 삶은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대승경전에서는 과거의 기억에 얽매임 없이 새로운 연기적 상황과 만나야 한다는 것을 두고, ‘목숨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과거가 실재하지 않는데, 기억과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과거에 발목이 잡혀 새로운 연기적 상황에 충실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려하는 말이다. 심지어 ‘나에 대한 예상과 기대도 갖지 않아야 하며, 삼보(불법승)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사성제(고집멸도)도 놓아야 한다’고까지 했다. 삶과 인생이 새로운 것과의 부단한 만남일 뿐, 과거의 기억에 매어 있어야 하는 희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으로, 희론을 구성하는 토대가 바로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한다고 상상하는 기억이다. 만남과 접촉은 느낌을 갖게 한다. 그 느낌은 알아차림과 다른 영역의 정신작용이다. 새로움은 느낌으로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지만, 극히 일부만이 실제 알아차림의 영역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그 알아차림은 기억을 만들어내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주관이 형성된다. 따라서 사람의 ‘됨됨이’는 ‘새로움을 어떻게 알아차리는가 하는 방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삶은 다름 아닌 바로 그 ‘방식’으로 구성된다.

사회적 조건이나 경제적 토대는 모두 다 다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개인의 대응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집착을 놓음’이 불교적 전통에서 오래 고민해온 가장 이상적인 대응방식이다. 주관이 집착인데, 그 집착이 ‘실제하지 않는 것이 실제한다는 상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두고 ‘불선법’이라고도 했다. 바로 ‘엇나감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빗나감을 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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