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이 사람의 풍경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서학동 갤러리 김지연 관장 "계남정미소 다시 살릴 수 있다면 언제라도 힘 보탤 것"
김은정 기자  |  kimej@jjan.kr / 등록일 : 2015.10.08  / 최종수정 : 2015.10.08  23:55:05
   
▲ 지난 2012년 9월‘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가 문을 닫았다. 7년 가깝게 전주와 진안을 오가며 혼자 힘으로 모든 일을 건사해왔던 김지연 관장이 의지의 끈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비가 내리는 날, 동서학동 귀퉁이 골목에서 만난 김지연 서학동사진관 관장이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봉주 기자
 

진안군 마령면 계서리 계남마을 입구에 있는 오래된 정미소가 문화공간으로 변신한 것은 2006년 봄이었다. 산과 강이, 들과 숲이 푸르게 달려오던, 찬란한 봄 햇살이 들판위로 쏟아져 내리던 바로 그 봄날이었다.

개관을 기념한 첫 전시는 〈계남마을 사람들〉. 마을 주민들의 개인사를 담은 100여장의 빛바랜 사진이 주인공이었다. 기억과 경험을 공유하는 일은 그렇게 시작됐다.

낡은 정미소 건물 이마에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란 이름을 달고 등장한 이 공간은 금세 화제가 됐다.

오래된 마을과 사람들, 그 일상의 흔적들을 길어 올려 추억하게 하는 일을 도모한 사람이 누구인가 관심이 쏠렸다. 사진가이자 전시기획자인 김지연씨(67, 서학동사진관 관장)가 거기 있었다.

계남정미소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숱하게 이름을 올렸다. 일 년에 많게는 네 번, 적게는 두 번 기획된 전시회는 마을공동체의 소중한 가치와 그 의미를 기억하게 하는, 그 자체로 또한 소중한 통로가 되었다. 때로는 사적인 기억이, 때로는 공적인 기억이 교차하는 이 공간은 새로운 것들에 열광하는 시대에서 충분히 특별하고도 새로운(?) 존재였다.

그런데 지난 2012년 9월, 계남정미소는 빗장을 걸었다. ‘잠정적 휴관’을 내세웠지만 빗장은 아직 열리지 않고 있다. 들여다보니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공간을 만들고 운영했던 김 관장의 고단했던 일상이 그 노정위에 놓여있다. 7년 가깝게 전주와 진안을 오가며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모든 일을 건사해왔던 김 관장이 결국은 의지의 끈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김 관장은 지난 2013년 봄, 전주 한옥마을 인근 동서학동에 〈서학동 사진관〉을 열고 새로운 문화 활동을 엮어가고 있다. 〈서학동 사진관〉은 역시 좁고 오래된 한옥을 고쳐 만든, 지역에서는 유일무이한 본격적인 사진전문 갤러리다. 개관한지 3년째, 50평도 채 안 되는 비좁은 공간의 존재는 빛난다. 온전히 그가 일구어온 힘이다.

비가 내리는 날, 동서학동 귀퉁이 골목에서 만난 〈서학동사진관〉은 예뻤다. 인터뷰 내내 쏟아지는 빗소리가 작아졌다 커졌다를 반복했다. 계남정미소와 서학동사진관을 잇는 10여년 노정이 그 소리위에서 움직였다.

-갤러리가 조용하군요. 개인적인 작업을 하시기 에는 더없이 좋겠습니다.(웃음)

“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니 관객들이 들러주는 것이 좋은데, 그렇다고 너무 많이 관객들이 찾아와 번잡해지면 혼자 감당하기 버거울 것 같아요. 워낙 드문드문 찾아오시니까 이런 분위기가 낯설지는 않습니다. 그 사이 제 일도 좀 할 수 있고요.”

-서울 전시를 앞두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준비로 바쁘시겠군요.

“10월 3일에 시작해 11월 30일까지 이어지는 전시입니다. ‘빈방에 서다’가 주제인데 지난번에 선보였던 ‘낡은 방’에 이어진 작업이에요. 방이라는 주제를 확장시킨 이 두개의 작업을 함께 묶은 사진집도 나옵니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지극한 시선이 더 농밀해졌을 것 같습니다. 역시 공간이 대상이겠죠.

“오래된 마을을 돌아다니다보면 사람이 모두 떠나버리고 없는 빈집, 빈방에 발을 들여 놓을 때가 많습니다. 흡사 관 속에 들어가는 것 같은 서늘함이 느껴지죠. 한 때는 가족의 희망이며 보금자리였을 공간이 모든 희망을 걷어가 버리고 절망과 회한만을 남기고 간 자리로 남아있는 모습은 안타깝습니다. 이런 공간을 남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지만 누군가가 살았던 소중한 공간을 기억하는 일, 그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작은 위로가 된다는 믿음으로 하는 일이죠.”

- ‘서학동 갤러리’가 개관한 것이 2013년 봄이니 계남정미소를 휴관한지 5개월 만에 다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셈입니다. 계남정미소 휴관을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는데, 갤러리 개관과 연관이 있었나요.

“많은 분들이 계남정미소를 닫고 서학동 갤러리 문을 여니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실상은 전혀 관계없이 이뤄진 일이거든요. 계남정미소는 제가 할 수 있는 물리적 정신적 능력의 모든 한계에 맞닥뜨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일입니다. 당시에는 어떤 공간을 다시 운영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그러나 결과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고, 다시 혼자 힘으로 운영해가고 있지 않습니까.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이죠.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진가가 전주에 갤러리를 마련하고 싶어 했어요. 그 일을 도와주다가 지인으로부터 이 공간을 소개 받았지요. 우여곡절 끝에 집주인이 되었는데, 속마음으로는 계남정미소를 살리지 못하고 끝내 나와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서울의 사진전문갤러리 류가헌 같은 갤러리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또 뛰어들게 된 것이죠.”

-말씀이 나왔으니 계남정미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7년 가깝게 운영해오셨는데 왜 갑자기 휴관을 했습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전주에서 정미소까지 매일 출근하는 노동 강도는 그만두고라도 운영과 관리, 기획과 자료수집, 전시에 관한 모든 일을 혼자서 해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운 한계를 맞게 된 거죠. 제 의지로 만들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6년 넘게 버텨오면서 그래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런 믿음도 한순간에 허물어지더군요.”

-그래도 그렇게 견디고 버텨온 시간이 6년이 넘었지 않습니까.

“휴관을 결정하기까지 지역 분들을 모셔서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자원봉사 할 사람을 찾아보기도 했고.......사실 갑작스럽게 문을 닫은 것이 아니거든요.

-계남정미소는 마을 공동체의 의미를 되살리는 가치 뿐 아니라 낡은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모범적 사례로도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지역에서도 계남정미소는 자랑스러운 자산이었고 자긍심이었는데 행정의 지원은 없었나요.

“전국의 사설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모두 안고 있는 어려움 일 텐데, 형식적인 지원만으로 이런 공간을 유지해나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자치단체나 지역의 도움에 의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공공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 자치단체나 지역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줘야겠더라고요. 개인적 역량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거든요.”

-여러 가지 제도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요.

“계남정미소 폐관 소식이 알려지면서 뒤늦게 정미소를 살려야 한다는 요구가 지역에서도 있었어요. 그래서 재작년에 자치단체 협조까지 받아가며 사립박물관 등록을 추진했었죠. 거의 모든 절차를 밟았는데 포기했어요. 공간의 특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기존의 박물관 시설과 기능에 맞추어 모든 것을 갖추어야하는 현실적 부담이 너무 버거웠거든요.”

-그 뒤로는 어떤 노력도 더해지지 않고 있습니까.

“뜻있는 지인이 마을 공동체 운동을 하고 싶다고 해서 기꺼이 열쇠를 내주었어요. 몇 분이 사겠다고 나섰지만 팔지 않고 그 공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누구라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개인적 이익이 아닌 공공적 일을 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으로서는 마냥 기다리고 있기도 안타깝습니다.”

-그대로 두면 건물 자체도 유지되기 어려울 텐데요.

“가장 마음 쓰이는 일이죠. 건물이 삭고 허물어 내리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고 내가 괜한 일을 했던 것이 아닌가 후회도 들어요.”

-그래도 후회하신다는 이야기는 뜻밖입니다.

“정미소는 개인적인 공간이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제 작업을 위해 마련했지만 처음부터 목적을 바꾸었죠. 마을에 사라져가는 것들을 주민들과 함께 살려내면서 문화공동체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지금은 전국적으로 그런 활동들이 많이 확산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낯선 일이었거든요. 계남정미소는 그런 활동을 하기에 환경이 좋지는 않았죠. 허허벌판에 서있는 낡은 정미소에서 그런 활동을 어떻게 꾸려갈 수 있겠는가, 사실은 저 스스로도 의심하면서 일을 했습니다.”

-정미소를 선택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정미소를 문화공간으로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고, 그 전부터 해왔던 사진작업 덕분이었어요. 사라져가는 것들에 주목하고 있는 저에게 2000년 즈음 급격하게 없어져가는 정미소가 크게 다가왔어요. 진안을 비롯해 전라북도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정미소를 찍고 다른 지역도 찾아 나섰어요. 수백 개의 정미소 풍경을 얻을 수 있었는데 정미소 내부를 살려놓은 공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침 계남정미소를 만나게 되었죠.”

-아무런 지역적 연고가 없는 곳에서 공동체 운동을 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을 텐데요.

“무모한 시작이었죠. 그래서 오히려 주목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중간에도 너무 힘들어 그만하고 싶을 때가 많았어요. 마을 사람들도 협조적이지 않았거든요. 2년 정도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아는 사람도 한명 없는 곳에 와서 그렇다고 성공한 예술가도 아닌 아줌마가 이상한 짓 하고 있다는 시선이 많았거든요.”

-그래도 지역의 많은 분들이 휴관에 들어갔을 때는 안타까워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었죠. 마을 분들도 그렇지만 오히려 인근의 다른 마을 분들이 많이 아쉬워했어요. 기획전이나 책 작업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러 다닐 때 그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일이 참 많습니다. ‘이장님’들 사진 찍으러 다닐 때도 그 분들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일을 즐겁게 했죠. 마을에서도 휴관 후에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많이 생겼는데 언젠가 계남에 갔더니 이장님이 ‘전주에 전시관 만들었다면서요’하고 물으시더라고요. 바람피우다 들킨 사람처럼 마음이 콩닥거려 혼났어요.(웃음)”

-그래도 진안의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록으로 엮고 자료로 남기는 작업이 정미소의 결실로 남아있습니다. 의미도 있고 보람도 큰 작업이었죠.

“진안의 사회사로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귀한 작업이었죠. 2010년과 11년에 개인적으로 작업에 집중했는데, 마을이야기나 용담댐 기록을 진행하면서 물리적으로 너무 힘들게 되니 대상포진이 오더라고요. 거의 초죽음이 되어 더 이상 지탱 할 수 없게 되었죠.”

-그만큼 계남정미소의 부활이 바람이기도 하겠습니다.

“물론이에요. 저는 비록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전주로 나와 새로운 일을 하고 있지만 계남정미소가 마을공동체의 중심공간으로 되살려질 수 있다면 언제라도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뜻있는 분들이 있으면 좋겠어요. 마을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오늘의 농촌 현실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죠. 뭔가 답을 찾고 싶은데 아직은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김 관장은 계남정미소 휴관에 스스로 얹어 놓은 마음 빚이 큰 듯 보였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의 이야기는 담담함과 격정 사이를 오갔다.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은 담담함으로 추억되다가 고단했던 시간은 격정으로 차오르기 일쑤였다.

사실 여러 해 동안 발품 팔아가며 누볐던 진안의 마을과 진안사람들의 역사를 기록으로 안고 있는 그의 여정은 놀랍다. 사진가이자 전시기획자인 그를 ‘아키비스트(archivist)’라고 불러도 낯설지 않은 것은 그 여정 때문이다.

지난 봄, 서학동 사진관에서 ‘서학동 언니 프로젝트’라 이름 붙인 전시회가 열렸다. 지역을 가르며 돋보이는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이 김지연 관장을 응원하기 위해 나선 전시회였다. 전시회의 이름만으로도 흥미로웠던 자리에서 그의 외로운 투쟁은 힘을 얻었다.

새로운 것들에 열광하는 시대지만 사진가로서 그가 기록하는 모든 것들은 새로운 것들보다도 더 빛난다. 일흔을 앞둔 나이에도 열정이 식지 않는 그의 작업을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 [김지연 관장은] 민중생활사 아카이브 구축한 '정미소' 작가

   

김지연 관장은 1948년생이다. 일흔을 앞두고 있지만 농촌을 누비며 사라져가는 것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그의 치열함은 세월을 잊은 지 오래다.

광주가 고향인 그는 결혼하면서 전주사람이 됐다. 서울예전 연극영화과를 다녔던 그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에 맞부딪히면서 꿈을 접었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20여년 온전히 주부로 살았지만 삶이 강퍅할 때는 잊혔던 어릴 적 꿈은 가끔씩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문학과 철학 미학 등 관련 있는 분야를 책으로 만났다. 살림만 하던 그가 꿈을 다시 되살려 뛰쳐(?) 나온 것은 나이 오십에 이르러서다. 우연히 서울의 한 기관에서 여는 사진 무료강좌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다. 사진은 다른 장르에 비해 오랜 숙련기간이 필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계의 도움을 얻어 생각과 의지를 담아낼 수 있는 사진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처음에는 강렬한 이미지로 감동을 주는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작가로 인정받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지연과 학연으로 얽혀진 예술계의 장벽은 예상보다도 훨씬 높았다. 자괴감으로 심한 갈등을 겪으며 그는 단단해졌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 마음을 잡았다. 처음 마주한 대상이 정미소다. 그는 잘 찍겠다는 욕망을 버리고 천천히 기록해가겠다는 마음을 다잡으며 카메라를 마주했다.

2002년 서울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예술적 완성도에 무게를 놓은 주류 사진예술 풍토에서 그의 사진은 폄훼됐다. 기록으로서의 사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그의 작업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서울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전시회에 참여하면서다. 기록사진이면서도 영상미와 사진예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진을 평론가들이 주목했다.

그는 ‘정미소 작가’가 되었다. 이후 이어진 작업은 ‘김지연 만의 기록사진’을 구축했다. 이발소, 묏동, 근대화상회, 학교, 이장님, 낡은 방, 빈집, 장날을 비롯해 마을공동체의 작은 유산들이 그의 카메라 안으로 들어가 역사가 되었다.

2006년 봄, 오래된 정미소를 되살려 공동체박물관을 만들었다. 진안군 마령면 계서리에 문을 연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다.

외롭고 고단한 여정이 시작됐으나 작업은 더 치열해졌다. 전주에서 진안의 계남마을을 오가는 일상은 그를 ‘전사’로 만들었다. 〈계남마을 사람들〉을 시작으로 〈마이산에 가다〉 〈시간에게 길을 묻다-진안골 졸업사진첩〉 〈전라북도 근대학교 100년사-우리학교〉 〈용담댐, 그리고 10년의 세월-용담 위로 나는 새〉 〈시어머니의 보따리를 펼치며〉 등의 귀한 전시회가 정미소라는 공간에서 생명을 얻었다. 그러나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일구었던 정미소 작업은 더 이상의 물리적 경제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2009년 가을부터 휴관에 들어갔다. 2013년 봄, 전주 동서학동에 작은 한옥을 고쳐 사진전문갤러리 〈서학동 사진관〉을 열었다. 그가 꿈꾸는 도심의 새로운 마을 공동체를 실현해나갈 공간이다.

10여회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나는 이발소에 간다〉 〈우리 동네 이장님은 출근중〉 〈근대화상회〉 〈용담 위로 나는 새〉 〈정미소와 작은 유산들〉 〈삼천 원의 식사〉 등의 사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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