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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경찰 70년 명암 (상) 전북경찰 과거 공과
광복 70년, 경찰 70년 명암 (상) 전북경찰 과거 공과
  • 백세종
  • 승인 2015.10.2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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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출신 호국 영웅 '자랑' / 일제 앞잡이·고문 수사 '오명'

전북경찰이 21일로 창경 70주년을 맞았다. 해방된 이후 창설된 전북경찰은 일제 이후 친일 행적 경찰들이 전북경찰 간부로 초기에 재직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와 달리 미군정 체제의 인사와 인물난 속에서도 도내 출신으로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경찰관도 있었다.광복 70주년을 맞은 올해, 같은 나이인 전북경찰의 과거의 공과, 그리고 현재와 앞으로 나아갈 길을 2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경찰의 혼과 호국경찰

전북경찰의 70년사에는 독립운동을 했다가 경찰에 투신한 이례적인 인물이 있다. 경찰 내부에서 ‘한국 경찰의 혼’이라 불리는 차일혁 경무관이 그 주인공이다.

1920년 7월 김제에서 태어난 차 경무관은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광복후 전주 제18전투경찰대 대대장(경감)으로 취임했다. 총경까지 이르는 동안 한국전쟁 당시 수 차례 빨치산을 토벌했고, 1953년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해 사실상 전쟁을 마무리 했다.

지략과 솔선수범을 통한 부대사기 관리 및 전투력 유지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작전중에는 민폐를 금지한 철저한 원칙주의를 실천했던 뛰어난 지휘관이었다는 평이다.

화엄사와 쌍계사, 천은사 등 지리산 일대 고찰과 금산사, 백양사 등을 전쟁의 불길속에서 구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경찰공무원으로는 처음으로 2008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고 2011년 8월 경무관으로 승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북경찰은 전시체제로 돌입해 전투경찰 3개 대대를 편성, 익산 용안과 망성지구를 공격한 북한군 3000여명을 700명의 경찰력으로 격퇴하고 충남 강경까지 진출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후 전세에서 밀려 후퇴하기도 했지만 9월15일 인천 상륙작전에 힘입어 미 제25사단과 함께 9월29일 전주를 수복했다.

차 경무관은 1951년 1월14일 남한의 유일한 발전소인 정읍 칠보발전소 사수 전투(75명 대 2000명)를 비롯, 빨치산 토벌에 나서면서 전북지역의 안정을 가져오기도 했다.

△ 친일행적의 전북경찰

전북경찰의 호국의 뒤에는 친일 행적도 드리워져 있다.

친일행적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깊숙하게 개입해 ‘백두산 호랑이’라 불리는 김종원은 전북경찰의 어두운 과거로 꼽힌다.

일본군에 자원 입대한 뒤 독립군과 조선인들을 가혹하게 대하고 해방 후 여순 반란 사건을 진압해 악명을 떨쳤던 그는 전북경찰국장을 지내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개입한 공을 인정받아 치안국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의 사진은 지금도 전북지방경찰청에 걸려 있다.

익산 출신으로 대표적인 친일 경찰인 신상묵은 일제 강점기 독립군을 탄압한 유명한 일본군 부사관 중 가장 높은 계급인 ‘군조’에 올랐다. 매일신보 좌담회에 참석해 전쟁지원 각오를 피력하거나 일본군 지원을 독려하는 투고문을 싣기도 했다.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뒤 돌연 입장을 바꿔 일제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훈장까지 받은 한종건도 있다. 그는 1935년부터 36년까지 전북 경찰부 경무과에서 ‘경시(지금의 총경)’ 계급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광복이후 경무부 차장, 전북청장 등을 지냈고 5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김재호 지부장은 “당시 친일행위를 했던 이들이 경찰에 대거 입문하게 된 것은 이승만을 선택한 미군정의 입장에서 자기들의 입장을 가장 잘 따르고 대변할 수 있는 이들이 친일파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뒤 “광복 70주년을 맞은 경찰이 과거의 과오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잘못된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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