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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형수의 마지막 이야기
두 사형수의 마지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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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2.0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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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 경희대 객원교수

로마 가톨릭의 수도사였던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보다도 한발 더 나갔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긴 하지만 태양이 우주의 중심은 아니고, 그 뒤로 무한한 우주가 또 있다는 것이다. 지동설만 주장해도 극형을 받던 때라,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1600년 2월 17일 화형에 처해진다. 브루노는 사형이 선고되자 ‘유죄를 언도 받은 나보다 언도하는 당신들이 더 떨고 있구려!’라며, 무지한 종교재판을 질타했다. 훗날 빅토르 위고와 입센 같은 작가들이 모여,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그를 위해 화형당한 그 자리에 동상을 세우게 된다. 결국 자유인의 모범이 된 그는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 베드로 광장 높은 곳에서 사상의 자유를 상징하고 있다.

당락이 사상이고 의석수가 이념

그에 비해 요즘 우리나라의 정치판을 보면 말 그대로 가관이다. 얼마나 식상한지 듣고 보기조차 역겹다. 어쩌면 이 글도 다른 얘기인줄 알고 읽다가 식상한 정치판 얘기가 나오니 덮어버릴 수도 있다. 왜 그럴까? 여태껏 정치가 국민에게 크게 희망을 준적은 없었다지만,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 정치에 브루노와 같은 이념과 사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공천과 당락이 사상보다 중요하게 되었고, 정당의석수가 이념보다 중요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허니 선거가 시작되면 괜히 복잡하고 어려운 정책 내세울 필요 없다. 그저 연금을 얼마씩 준다던지, 보육비나 등록금을 대주겠다는 식으로 미끼만 잘 던지면 되는 것이다.

하기야 장자는 ‘무치주의’라 하여 백성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백성의 의지대로 방임하는 것을 이상적인 정치형태로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적인 흐름이나 많은 백성의 뜻에 순종한다는 의미지, 정치하는 사람들의 편익을 위한 말은 아니었다. 즉 작금의 현실처럼 자신의 당락이나 정당의 의석수를 위해서 이념이나 사상마저 버린 정치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또 다른 사형수를 보자. 소크라테스는 72세에 유죄선고를 받고 독약을 마셔야 했다. 당시 아테네에 만연한 편견과 당파심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도 사형을 언도 받자 브루노처럼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제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나는 죽고 너희는 살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이 나은 운명인지는 신만이 아신다’라는 것이다.

맞다, 어떻게 사는 것이 나은 삶이었는지 신만이 아실 것이다. 그래서 판사는 판결로, 기자는 기사로, 작가는 작품으로, 교수는 강의로 말해야 한다. 그래야 신이든, 후세든 간에 그들의 삶을 평가할 것 아닌가.

정치인은 무엇으로 말해야 할까

허면 정치인은 무엇으로 말해야 할까? 무엇으로 어떻게 표현하고 선택을 기다려야 하느냐는 물음이다. 철학적인 물음을 던졌지만, 그들이 주는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계산기다. 이합집산의 아수라판에서 잔류해야 할지, 탈당해야할지 유불리를 따져 계산기를 두드려야 한다. 문재인이면 어떻고, 안철수면 무슨 상관이겠는가! 우선 내게 공천을 줄 것인지를 따져봐야 하고, 그 다음은 어떤 색깔의 옷을 입고 나와야 유리할지가 가장 큰 관건이다.

브루노나 소크라테스처럼 신만이 아는 얘기나, 신념이나 사상 따위는 애당초 얘기꺼리조차 안 되는 것이다.

하기야 그렇게 길들인 것이 유권자들인데 누구를 탓하랴마는, 총선 앞두고 진흙탕에서 뒹구는 모양새가 하도 한심해서 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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