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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100년 하나 되는 세상을 그리다 ⑥ 원불교 지도자
원불교 100년 하나 되는 세상을 그리다 ⑥ 원불교 지도자
  • 은수정
  • 승인 2016.03.0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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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마련·교단 확립·교세 확장 통해 새 종교 위상 세워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少太山 朴重彬 大宗師, 1891~1943)가 개교한 원불교는 정산 송규 종사(鼎山 宋奎 宗師, 1900∼1962), 대산 김대거 종사(大山 金大擧 宗師, 1914∼1998), 좌산 이광정 상사(左山 李廣淨 上師, 1936∼)에 이어 지난 2006년부터 경산 장응철 종법사(耕山 張應哲 宗法師, 1940∼ )가 이끌고 있다. 종법사는 원불교 교단의 최고 지도자로,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을 이어 교리를 마련하고, 교단 체계를 세우고, 교세를 확장하는 등 오늘의 원불교를 만들어낸 이들이다.

△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1891~1943)

1891년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태어난 소태산은 어릴때부터 대담하고 신의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진리에 대한 물음을 갖게 된 것은 7세 때 부터다. 하늘과 바람, 구름에 대한 물음은 부모와 이웃의 인연으로 확장됐고, 산신(山神)을 만나기 위한 기도로 이어졌다.

소태산이 26세가 되던 1916년 기도 중에 20여년 동안 품어온 물음을 풀어주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우주의 이치는 하나이며, 그 이치는 생멸(生滅)이 없고, 인과(因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깨달음 후 소태산은 덕(德)과 위엄(威嚴)이 더해졌는데, 이후 40여명의 제자를 얻게 됐다. 소태산은 제자 가운데 8명을 상수(上首)제자로 삼고, 단(團)을 조직해 저축조합을 만들고 허례를 폐지하는 등 생활개선운동을 벌였다. 또한 바다를 막아 농토를 만드는 간척사업을 벌여 8만6천여㎡의 ‘정관평’이라는 논을 만들었다. 소태산은 제자들의 교화에도 힘을 쏟았는데, ‘구간도실’이라는 교당을 만들어 구도생활을 하도록 했다.

원불교 교법은 전북 부안의 실상초당에서 마련했다. 이후 1924년 당시 이리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창립총회를 열고, 임시교명을 선포했다. 이때 소태산이 총재로 추대됐다. 익산 총부 건설도 같은해 시작됐다. 총부 건설당시 전주와 서울 영산 등 각지의 불법연구회 회원은 130여명 이었으며, 전무(專務)출신은 13명이었다.

소태산은 총부 건설후 전무출신은 의식주 공동생활을 하도록 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체제를 갖추고, 교서 발간 등 교리체계도 마련했다. 또한 총부에 대각전을 건립하고 일원상(○)을 봉안하는 등 신앙 대상과 수행방법도 제시했다. 이러한 소태산과 불법연구회 활동은 조선총독부의 감시대상이었다. 일제는 교단을 해체시킬 목적으로 총부내에 주재소를 설치하고 경찰을 상주시키기도 했다.

원불교를 열고, 새로운 종교로서의 교리와 교단의 기틀을 다진 소태산 대종사는 1943년 열반했다. 그는 열반 전 법문을 통해 “생과 사를 자유할 실력을 갖추고, 생령(生靈)을 위하여 희생 봉사하는 일에 힘을 다하라”는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

▲ 익산 중앙총부에 있는 종법원. 종법사가 상주하며 교단을 돌보는 곳이다. 사진제공=원불교

△ 정산 송규 종사(1900~1962)

경북 성주군 초전면에서 태어난 정산 종사는 18세 때 스승을 찾아 전라도에 왔다가 정읍에서 소태산을 만나 사제(師弟)의 연을 맺는다. 이후 소태산의 ‘9인 제자’에 들게 된 정산종사는 전남 영산에서 함께 생활한다. 제자들이 창생(蒼生)을 위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사무여한(死無餘恨)’이라고 쓴 종이에 백지장(白指章)을 찍었는데, 혈인(血印)이 나타난 이적을 경험한 후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법명(규, 奎)과 법호(정산, 鼎山)를 받는다.

소태산을 도와 불법연구회 설립과 총부건설 등을 하던 정산 종사는 전남 영광의 영산지부장 겸 교감으로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다. 특히 그는 원불교 초기 역사를 정리한 <불법연구회창건사>를 저술했으며, 소태산이 깨우친 ‘일원상’의 진리를 구체화했다.

정산 종사는 1943년 소태산 열반 후 종법사로 추대됐다. 특히 그는 광복 후 <건국론>을 지어 새 조국 건설을 강조했는데, 국력배양과 정치·경제·교육의 독립을 강조한 것으로, 이후 원불교에서는 동포구호사업과 한글보급운동, 고아원 경영 등으로 구체화되기도 했다. 또한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갖고 1946년 총부내에 교역자 전문양성기관으로 유일학림을 개원했다. 유일학림은 후에 원광중고등학교와 원광대학교로 발전됐다.

‘원불교’라는 교명도 1948년 정산 송규 종사가 선포했으며, ‘종법사’ 라는 호칭도 <교헌>이 정식 선포된 이때부터 사용됐다.

정산 종사는 소태산의 교화 교육 자선의 교단 방향을 더욱 발전시키고, <대종경> 등 경전도 발간했다. 특히 원불교 교서편찬 업무를 담당하는 ‘정화사’를 발족시켰다. 또한 소태산을 후천개벽시대의 주세불로, 원불교를 주세종교로 천명하고, 동원도리·동기연계·동척사업의 삼동윤리를 통해 세계는 하나의 진리, 인류는 한 가족 임을 강조했다.

정산 종사는 1962년 열반에 들 때까지 20년 동안 원불교를 이끌었다.

△ 대산 김대거 종사(1914~1998)

대산 김대거 종사는 정산종사 법통을 이어 1962년부터 교단을 이끌었다.

대산 종사는 전북 진안군 성수면 출신으로, 11세 때 진안 만덕산 만덕암을 찾은 소태산을 만나 원불교에 귀의했다. 이후 16세가 되던 1929년 출가해 총부에서 생활하면서 소태산과 은부자(恩父子)의 연을 맺었다. 특히 대산 종사는 소태산 열반때까지 대종사 시봉(侍奉)이나 교단 간부를 맡아 대종사의 가르침을 곁에서 정리했다. 소태산에 이어 정산 종사를 보필해 교단 발전에 큰 역할을 했는데, 정관평 재방언공사를 이끌었고 영산성지사업의 기초도 마련했다.

특히 대산 종사는 소태산의 일원주의 사상과 정산 종사의 삼동윤리 정신을 계승해 종교연합운동을 벌였으며, <정전대의>를 비롯해 많은 법문을 남겼다. 대산 종사는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를 가르침으로 남겼다.

1994년 좌산 이광정 상사에게 종법사를 물려준 후 1998년 총부에서 열반했다.

△ 좌산 이광정 상사(1936~ )

좌산 이광정 상사는 1936년 전남 영광군 대마면에서 태어났다. “인생의 많은 문제에 대한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1954년 전무 출신 출가를 결심하고, 이후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입학했다.

좌산 상사는 정산 종사와 대산 종사를 모시면서 가까이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일선 교당에서 교화현장을 경험하기도 했다. 교단이 확장되자 ‘교화연구소’를 건립해 교화정책 연구와 각종 교재를 개발하는 등 교화발전을 위한 기틀을 다지고 체계를 확립했다.

원불교 문화정책 기반도 다졌는데, 문화부를 독립시키고 문화회관 건립과 중앙박물관 설립 등 문화자산 관리정책을 수립했다. 좌산 상사는 또 교육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교육발전계획도 만들었다.

1994년 대산 종사 법통을 이어 종법사에 추대돼 12년 동안 교단을 이끌었다. 좌산 상사는 중앙총부 경제자립과 정산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원음방송국 개국 등을 했으며, 군(軍)교화의 길도 열었다. 지난 2006년 경산 장응철 종법사에게 자리를 물려준 후 교단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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