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이 사람의 풍경
고창농악보존회 이명훈 회장 "풍물 자체가 삶이고 놀이였던 어르신들에게서 배워"
김은정  |  kimej@jjan.kr / 등록일 : 2016.06.02  / 최종수정 : 2016.06.13  10:47:08
   
▲ 30여년 가까운 세월 고창 농악을 보존하고 발전 시켜온 이명훈 고창농악보존회 회장이 스승인 황규언 선생의 공적비를 둘러보고 있다. 안봉주 기자
 

전북은 농악의 맥이 탄탄하고 화려하다. 농악이 어느 특정한 지역의 전유물이 아닌 마당에 그 수준이나 질을 거론하는 것은 적절치 않지만 적어도 호남, 그중에서도 전북의 농악은 한국의 농악을 대표하는 큰 줄기를 잇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우리의 전통문화 대부분은 원형을 잃거나 훼손되었다. 농악도 예외가 아니지만 다른 장르와는 달리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농촌의 현장에서 사그라져가고 있던 농악이 오늘에 이르러 그 지역적 특성을 온전히 지키면서 계승되어 질 수 있었던 동력의 정체(?)다. 들여다보면 그 한 바탕에 엄혹한 시대 상황을 직시한 젊은 세대들의 열정이 있다. 한 시대, 농악은 대학의 ‘동아리 문화’의 한 중심을 지켜왔다. 방학이 되면 농촌으로 들어간 젊은이들은 봉사활동을 하면서 현장에서 농악의 원형을 몸으로 마음으로 익히며 받아들였다. 한때 농촌에서보다 대학의 광장에서, 도심의 거리에서 더 활발하게 농악이 울렸던 이유이기도 하다.

엄혹한 시대를 향한 젊은이들의 표현과 발언의 통로가 되었던 농악의 존재는 지역적 한계를 갖고는 있지만 비교적 건재하다. 고창농악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농악이다.

1985년, 고창에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당시 고창문화원장이었던 향토사학자 이기화씨가 오거리당산제 재현을 위해 고창지역 마을마다 통문을 보내 풍물잽이들을 불렀다. 그 통문을 받고 모인 풍물잽이들은 놀랍게도 500명이나 되었다. 자연히 심사를 거칠 수밖에 없었는데, 기량으로 40여명을 뽑고 보니 50대부터 70대까지 노인층이 대부분이었다. 젊은 시절 ‘한가락’했던 ‘잽이’들의 귀환은 의미가 있었다. 고창농악보존회가 탄생한 바탕이다. 고창농악을 다시 살려 지키고 전승해온 고창농악보존회의 ‘간판’으로만 보자면 30여년 이력을 갖고 있지만 그 뿌리는 1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1990년대 초반, 고창농악단에 20대 여성 풍물잽이가 합류했다. 오늘의 고창농악보존회를 이끌고 있는 이명훈 회장(48)이다. 스물세 살에 고창농악을 만났으니 올해로 25년 째, 쉰을 바라보고 있는 그가 고창농악을 지켜온 역사는 눈물겹다.

여름 더위가 미리 찾아온 봄날, 고창군 성송면에 있는 고창농악전수관에서 그를 만났다. 전수관은 지금 대대적인 공사가 한창이다. 1999년 학천초등학교가 폐교되자 이듬해 고창농악보존회는 이곳을 위탁받아 전수관을 만들었다. 그 후 15년, 고창농악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풍물을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뒤를 잇자 자치단체가 전수관 건립에 나섰다. 오는 6월 준공 예정인 고창농악전수관은 고창농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열정이자 희망이다.

“오랜 소망이 이루어지는 셈이에요. 규모가 커서 어깨가 무겁기도 하지만 잘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의욕이 더 큽니다.”

여전히 앳되어 보이는 그의 얼굴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

-전수관 식구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고창농악 본래의 일 뿐 아니라 공연이나 다른 기획프로그램이 많아졌거든요. 지난해부터는 〈한옥자원활용 야간상설공연〉까지 제작하게 되면서 일거리가 더 늘어났습니다.”

-생각보다 전수관이 고창 읍내에서 많이 떨어져 있네요.

“읍내에서 12킬로미터 정도 거리죠. 이곳으로 온 이유가 있었어요. 고창농악단 상쇠 황규언 선생님이 계시던 곳이었던 점이 첫번째였고, 연습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소음 때문에 민원이 많은데, 이곳은 그럴 걱정이 없었죠.”

-언제 전수관을 열었습니까.

“학천초등학교가 1999년에 폐교 되었는데, 저희가 그 이듬해 1월 전수관 문을 열었어요. 교육청에서 무상임대로 제공해주어서 2005년까지 사용하다가 이후에는 군이 매입을 하고 숙소동까지 지어 고창농악보존회가 위탁운영하게 되었습니다.”

-단체 이야기 말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풍물은 언제부터 쳤습니까.

“대학 다닐 때니까 스무 살 때 시작했네요. 지금 제 나이가 마흔아홉. 아직 삼십년도 안됐군요.(웃음)”

-고창과의 인연은 고향이어서 인가요.

“시작은 그렇게 된 것은 아닌데, 결과적으로는 고향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노동자 문화운동연합 풍물분과에 들어갔었거든요. 선배들과 공부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농악을 전수받았었어요. 사실 고창이 제 고향이긴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풍물을 별로 본적이 없었는데, 농악을 배우러 다니다보니 자꾸 고창농악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91년엔가 이기화원장님을 찾아 뵈었죠. 그때 황규언선생님을 소개시켜주셨어요.”

-그때부터 고창농악단에 들어갔습니까.

“아예 옮겨왔던 것은 아니고, 오며가며 선생님한테 배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공연이 있다고 오라고 하셨어요. 그때 제가 만난 고창농악단은 정말 충격이고 감동이었어요. 30-40명 할아버지들이 꾸리는 농악단을 그때 처음 보았거든요. 이분들이 다 어디에서 오셨을까 놀라웠습니다. 또 각각의 기량은 얼마나 좋으신지. 신천지 같았어요.”

-어르신 모두가 스승이었겠군요.

“물론지요, 모든 악기는 물론이고 잡색까지……. 보고 듣는 것이 모두 가르침이었어요. 감동이었죠.”

-그분들이 어떻게 고창농악단을 지켜올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고창문화원 이기화원장님이 85년에 오거리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 각 읍면에 통지를 보내셨대요. 농악을 할 수 있는 사람들 다 모이라고. 그런데 고창 실내체육관에 500명이 모였다는 거예요. 놀라운 일이었겠죠. 그 분들 중 악기별로 잘하는 사람을 뽑아 농악단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고창농악단이 된 겁니다.”

-대부분이 한가락씩 하시던 분들이었겠습니다.

“그렇죠. 그 분들 중 꽹과리를 가장 잘치는 황규언 선생님이 상쇠가 되어 농악단을 이끌었는데, 누구하나 뒤처지는 분들이 없었어요. 그때 어르신들이 옛날 굿판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그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 분들이 살아 계실 때 고창 지역의 굿을 조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음이 조급해져서 그때부터 직접 나서 밤마다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굿 조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였죠.

“고창에 정착한 다음이니까 98년이에요. 제가 풍물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 전북대 국악과를 다시 들어가 졸업한 후거든요.”

-전북대 국악과에 들어간 것은 서울에서 활동할 때였군요.

“제가 93학번인데, 그때는 서울에서 단체 활동을 하면서 선생님들 공연이 있으면 내려왔었어요. 할아버지들이 정말 저를 예뻐 해주셨는데, 대학에 갔다고 돈을 얼마씩 걷어서 장학금으로 주시기도 했어요. 손녀처럼 대해주셨죠.”

-어르신들의 사랑 때문에도 고창에 오셨어야 했을 것 같습니다.

“그즈음 고창농악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고, 이런 좋은 가락과 장단을 나만 배워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제가 서울에 있는 대학생들과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중 연세대 풍물패 후배들에게 고창으로 내려가자고 권했어요.”

-오늘의 고창농악이 이어지게 된 바탕이 거기 있었군요.

“많은 사람들이 제 고향이 고창이니 이런 일을 했다고 하는데, 그 것은 아주 일부분 이예요. 털어놓자면 저는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고창에 와서 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어르신들이 보여주시는 그 모습에 반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죠. 그 분들의 삶이 온전히 담긴 풍물을 대하며 ‘저 바탕을 내가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사실 농악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물론이에요. 제가 오늘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함께 해온 후배들 덕분이죠.”

-고창농악단에서 나이도 어리고 게다가 여성이 대표를 맡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특별한 과정이 없이 자연스럽게 된 일인데, 상쇠였던 황규언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곧바로 제가 상쇠를 맡게 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갈등은 없었습니까.

“저는 원래 장구를 쳤어요. 황 선생님이 상쇠로 이끌 때는 가끔씩 끝쇠로 꽹과리를 치기도 했지만, 장고잽이가 주된 역할이었죠. 어르신 중에 부쇠도 따로 계셨고요. 그런데 상쇠란 자리가 꽹과리만 잘 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그 어르신도 가락은 좋은데 판 전체를 보고 이끌어 가는데는 한계가 있었어요. 제가 워낙 어르신들과 잘 통하기도 하고, 귀여워해주시기도 하니까, 그런 점들이 판을 어울어내는 데에 작용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자리를 놓고 분란이 생기는 단체들을 여럿 보았었습니다.

“그런 예가 많죠. 그런 점에서는 제가 복이 많아요. 이곳은 다 어르신들인데 어린 여자아이가 혼자 들어와 배우며 열심히 하는 것으로 보고 고창농악을 이어갈 사람은 이명훈이라는 생각들을 하셨던 것 같아요. 저도 뒤돌아보면 어려운 시절이 있긴 했어요. 2000년에 전수관 관장을 제가 맡게 될 상황이었는데 보존회장님이 안주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명훈이는 시집가면 고창을 떠날 아이’라고. 당시 제가 전수 작업이나 보존회 일의 중심이었거든요. 섭섭하더라고요. 자리에 대한 욕심은 아닌데 꼭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집을 안가고 고창농악을 지키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렇게 해야 의지를 믿어주실 것 같았죠.”

-가장 강한 협박이었겠는데요.

“맞아요. 제게 관장을 맡기셨죠. 그런데 회장님도 나중에 후회하셨어요. 제가 정말 결혼을 안하고 있으니 더 마음 부담이 크셨던 것 같아요.”(웃음)

-돌아보면 긴 세월입니다.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걸어온 길 인데요.

“마흔이 될 때까지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 지도 모르고 온 것 같아요. 그만큼 일이 많았어요. 굿 정리에 사람들 키우는 일, 마을농악단도 만들어야하고 이런 저런 행사도 치러야하고. 끝이 없었어요. 그런데 마흔이 넘어가면서 저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어떤 물음이 컸습니까.

“저의 정체성에 대해서죠. 나는 뭔가 하는……. 돌아보면 제가 진정한 굿쟁이거나 예술가였다면 달라졌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나한테 주어진 임무였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일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고창농악을 정리해놓은 작업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었죠. 98년부터 조사를 다니기 시작해 10년 만에 결실을 냈는데, 세권의 책으로 발간하고 보니 감회가 더 컸어요. 아마추어들이 열정하나로 강행한 일인데, 전문가들이 함께 했다면 더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겠지만 당장 어르신들이 계셔야 할 수 있는 일이니 미룰 수 없는 일이었죠.”

-한 지역의 농악을 이처럼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은 예가 또 있나요.

“지역 농악을 많이 정리 했는데, 저희처럼 체계적으로 방대한 양을 조사해서 한 예는 거의 없을 겁니다. 유일하다고 할 수 있어요.”

-고창농악에 관한 것은 거의 다 기록으로 남긴 셈이군요.

“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아쉬운 부분도 많아요. 어르신들이 살아 계신다면 아직 여쭤볼 것이 많이 있죠.“

-10년 작업을 해놓았으니 더 허탈한 마음이 컸을 것도 같은데요.

“그런 점은 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생각. 그래서 이제 제 할일이 없다는 판단이 들고, 그렇다면 이제 내 할일을 다시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정리도 했고, 가르치는 일도 할 만큼 해왔고, 대중적으로도 고창농악이 확산됐고, 이제는 잘 가기만 하면 되는 시점이 됐다는 판단이 드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이즈음은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고민이 깊어요.“

-답은 얻었습니까.

“제 굿을 치면서 살고 싶어요. 쟁이, 예술가로서 저 스스로 만족할만한 기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다른 분들은 후하게 평가해주시지만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격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크거든요. 돌이켜보면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던 지난 세월이 너무 아깝고, 20대와 30대의 빛나는 시절을 연행자로서 기량을 가꾸었으면 지금쯤은 우뚝 설 수 있는 나이가 아닌가하는……. 그래서 만족 안 되는 제 삶이 힘들었어요.”

-그렇다면 이제 연행자로서 ‘무대 위의 이명훈’을 더 가깝게 만날 수 있겠습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무대만이 제가 서야할 자리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제가 선생님들한테 반해서 풍물을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선생님들이 다 돌아가신 지금은 후배들에게 우리가 그것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생님들 같은 연행자들이 되어 있어야죠.”

30년 가까운 세월, 굿판을 지키며 고창농악을 보존하고 발전시켜온 그의 궤적은 빛났다. 가장 치열한 굿판의 현장에서 풍물 자체가 삶이고 놀이였던 어르신들을 만나 장단과 가락을 마음으로 정신으로 온전히 받아들였던 세월이 가져다준 선물이었을 터다. 그런데도 그는 정작 앞으로 가야할 길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진정한 굿잽이가 되는 길, 그가 다시 선택한 그 길이 쉬워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무대 위에서 더 빛나는 이명훈’을 만나는 즐거움을 머지않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 [이명훈 회장은] 고창농악 원형 발굴한 '진정한 굿잽이'

   

이명훈 회장은 1968년 고창군 고수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판소리 좋아하셨던 할아버지를 따라 김소희명창의 공연에 가거나 임방울이며 박동진 같은 명창의 소리를 할아버지의 테이프로 들어본 적은 있으나 우리음악에 특별한 관심은 없었다.

고창여고 시절, 문학에 재능이 있다는 선생님의 말에 용기를 얻어 서울예전 문창과에 들어갔다. 좋은 소설가가 되고 싶었으나 타고난 재능에 문학적 감성이 풍부한 동료들을 보며 ‘글은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길이 아니다’싶어 고민하다가 민요동아리를 만났다.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달라졌다. 풍물은 그렇게 시작했다.

졸업을 한 후에는 노동자문화연합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풍물을 공부했다. 선배들과 학습(?)하면서 전국의 농악단을 찾아다니며 장단과 가락을 배웠다. 고창농악을 알게 된 것은 그 과정에서였다. 호남 좌우도 농악 이야기가 나올 때면 어김없이 앞세워지는 고창농악의 면모가 궁금했다.

91년 고창에 내러가 이기화 고창문화원장을 만났다. 꽹과리 명인 황규언 선생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그는 고창을 오가며 황규언 명인을 스승으로 고창농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30-40명 어르신들은 손녀딸 같은 그를 애정으로 지켜보며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사랑과 관심을 주었다.

93년, 어차피 들어선 이 길을 제대로 가고 싶어 전북대 국악과를 다시 들어가 내친김에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같은 해 고창농악 전수 조교를 시작했다.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아들 다섯 사이에서 얻은 딸이 굿판이나 쫓아다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는 끝내 굿잽이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르신들의 기량에 마음을 뺏긴 그는 장고와 쇠, 고깔소고춤, 부포까지 다양한 부문의 기량을 배우고 익히며 연행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가 전수조교가 된 이후 고창농악보존회의 전수와 공연활동 대부분은 그의 손에서 기획되고 진행됐다. 그 즈음 서울의 마음 맞는 후배들을 불러들여 고창농악의 뿌리를 찾아 보존하고 발전시킬 바탕을 마련했다. 구재연 임성준 임승환 이성수 이광휴 주영롱 씨 등 오늘의 고창농악을 지키고 있는 후배들이 그들이다.

1998년에는 고창농악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할아버지들을 찾아다니며 구술을 기록하는 대장정이었다. 10년 동안 지속된 이 작업으로 〈고창농악〉 〈고창의 마을굿〉 〈고창농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과 예술세계〉와 같은 빛나는 결실을 얻었다. 그 사이 문굿과 풍장굿 같은 고창농악의 원형을 발굴하고 재현해냈으며 지난해에는 발굴된 굿을 새롭게 구성한 ‘풍무’를 전주에서 공연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개인적인 기량도 빼어난 그는 서울 민속박물관 토요무대,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서울국제무용제개막공연, 화성백중제 젊은 명인전, 서울세계무용축제 등에 초대되었으며, 현재 전북무형문화재 고창농악이수자, 상쇠 나금추 이수자로 활동하면서 고창농악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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