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시로 노래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했다"
콘 빅트 시절의 친구 켄너가 소개한 다섯 살 아래의 화가 슈빈트는 음악을 그림만큼 좋아해 '음악적 화가' 혹은 '그림 그리는 슈베르트'로 불리는 우정이다. 소녀같이 유순한 슈빈트를 슈베르트는 '애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슈빈트는 슈베르트에게 극작가이자 풍자시인이며 피아노도 잘치는 바우에른펠드를 소개하여 셋은 시와 음악과 술로 여러날을 새벽까지 함께 보내기도 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 슈베르트는 술도 자주 마셔 '술고래'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지는 않았다고 한다. 어느날 카페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데 테에블위에 있는 한권의 책을 보고 슈베르트가 갑자기 "좋은 노래가 떠올랐다. 오선지가 있으면 좋겠는데!"하니 친구들은 부랴부랴 메뉴판 뒷면에 오선지를 그려줬다. 슈베르트는 그곳에 떠오른 음악을 작곡했으니 그곡이 '들어라, 종달새'다.
슈베르트는 대개 아침 6시나 7시경에 일어나 정오까지 작곡에 전념한 후 카페나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신문을 보았다. 날씨 좋은 오후에는 빈 숲이나 도나우강으로 친구들과 산책을 가기도 했다. 밤에는 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나 포도주나 맥주를 마시며 시와 음악을 얘기하며 젊음의 낭만을 즐겼다. 20대 중반부터는 그의 음악이 빈 전역에서 연주되고 악보 출판도 활발해져 수입이 꽤 있었으나 자신의 집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비굴하지 않았고 겸손했으며, 영혼 속에 꿈과 이상을 간직한 순수한 낭만음악가였다. 그의 마음은 항상 시와 음악과 사랑으로 가득했다. 아뿔사, 그러나 한때의 방탕한 생활로 얻은 병마가 그의 생명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으니 스믈여섯살 젊은 천재 음악가 슈베르트는 간절히 기도한다.
'신성한 경외심의 깊은 동경이, 아름다운 세상에 손길을 펴고 전능한 사랑의 꿈으로 어두운 공간을 채울 수 있다면. 위대한 아버지여! 깊은 고통으로 죄과를 치루는 아들에게 손길을 펴사 당신의 사랑과 영원한 빛으로 구원을 내리소서. 보십시오, 진애 속에 무섭게 엄청난 고통으로 대가를 치루는 삶의 죄책의 경과가 영원한 파멸로 다가가고 있음을. 그것도 죽게 하고 나 자신도 죽게 하소서. 모든 것을 레테의 강속으로 떨어지게 하소서. 그리고 순수하고 강한 존재로, 오 위대하신 이여, 태어나게 해주소서(「시와음악」 3호 중에서 박경혜).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나는 해 3월에 열린 '슈베르트 연주회'는 큰 성공을 거두어 슈베르트는 모든 빚을 다 갚고 피아노도 구입했다. 건강도 좋아지는듯 하여 다시 작곡에 몰두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슈베르트는 지켜보는 형에게 '세상 구석에 쳐박아놓지마! 여기에는 베토벤이 누워있지 않아.' '아아 이제 마지막이네.'하며 세상을 떠났다. 남긴 것은 연미복 3벌과 모자 하나, 신발 5켤레와 바지 10개, 이불, 침대. 그리고 음악작품들과 미완성 작품들. 슈베르트는 평생 따르고 싶어하던 베토벤 옆에 묻혔다. 베토벤 장례식 때도 감동깊은 조사로 많은 조문객을 울렸던 슈베르트 친구 그릴파르쩌는 '방랑자여! 그대는 슈베르트 노래를 들어보았는가? 그는 여기에 누워 노래한다. 죽음은 여기 한 충만한 이를 묻었으며 그의 보다 아름다운 희망까지도 묻었다. 그는 시로 노래하고 음악으로 이야기 했다.'라고 묘비에 썼다.
/ 신상호(전북대 음악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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