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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관 가수는 - 해뜰날·네박자·유행가 히트…트로트 부활의 주역

프랑스에 샹송, 일본에 엔카, 미국에 록이나 컨트리 뮤직이 있다면 한국 대중가요의 대표선수는 뭘까. 바로 트로트(Trot)다. 지금 상류층에선 천박하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트로트는 일제시대에 주로 상류층이 향유하던 문화였다.

 

한국 가요계에 묵직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 그는 1945년 정읍시 태인면 태창 1번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송영근씨는 3·1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벌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그가 3살 때 실종돼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당연히 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만 태인- 정읍 동- 고창 동호- 태인 등 4군데를 다녀야 했다. 고창 동호초등학교는 숟가락 하나라도 덜기 위해 초임 발령받은 삼촌이 데리고 갔다. 숙직실에서 자취하면서도, 기죽지 않고 구잡스럽기가 이를 데 없었다. 노래와 싸움으로 가는 데마다 쓸고 다녔다.

 

그는 두 번 월반을 했다. 초등학교 4학년에서 6학년으로, 전주 서중학교 2학년에서 영생고등학교로 들어갔다. 월사금을 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야간고교에 다니면서 신문 배달도 하고 이발소에서 보조 노릇도 했다.

 

그러다 고교 때 KBS 전주방송국에 전속가수로 발을 디딘 게 노래와의 첫 인연이었다. 서울 노래대회에 나가 연속 3주 장원을 했다. 당시 KBS PD로 있던 유훈근씨의 소개로 오아시스 레코드사에 들어갔고 1967년 '인정많은 아저씨'로 데뷔했다.

 

이후 1975년 '해뜰날'이 히트하기까지 무명의 설움을 겪어야 했다. 이에 앞서 1973년 본인이 작사한 '세월이 약이겠지요'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해뜰날'이 대박을 터트렸다. 덕분에 수많은 상을 휩쓸었고 가수왕에 등극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스타덤에 올랐으나 칼러TV시대 개막으로 극장식 리사이틀이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일자리가 없어져 버렸다. 생계마저 어려워지자 잠실에 분식집을 차렸으나 만삭이 된 부인이 배달통을 들고 배달하는 게 안쓰러워 1980년 처가가 이민간 미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슈퍼마켓과 쇼핑몰,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한인사회에는 얼굴 한번 내밀지 않고 일만했다.

 

그러다 향수병이 생겨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던 1988년 귀국했다. 그리고 1989년 '정 때문에'를 발표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정 때문에는 20만 장의 레코드가 팔리고 라디오 차트에서 3개월간 1위를 했다. 이어 '차표 한 장(1992년)'등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계속해서 국민애창곡 '네박자(1998년)' '유행가(2003년)' '분위기 좋고(2009년)'를 내놓았다. '네박자'는 레코드 판매량 100만 장을 기록했다. 그 동안 정규음반을 23집까지 냈고, 제19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과 각 방송국의 최고가수상 등 굵직한 상만 28차례에 걸쳐 받았다.

 

지금은 7년 후배인 태진아와 함께 매년 라이벌 콘서트를 열고 있다. 2008년에는 남진에 이어 제2대 대한가수협회장을 역임했다. 2009년에 공주가 돌아왔다(KBS2) 2011년 신기생뎐(SBS) 2012년(TV조선) 등의 드라마에 출연해 연기솜씨도 뽐내고 있다. 가족으로는 92세된 노모를 모시고 이화여대 무용과를 나온 부인 이정심씨(60)와 두 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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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진 chos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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