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김정문이 남원 사람인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남원 출신이 아니다. 호적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면, 김정문은 1887년 전북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143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21년에는 임실군 성수면 도인리로 이사하였다가, 1931년 남원시 주천면 상주마을로 이사하였다. 그러니까 김정문이 남원에 산 기간은 5년을 넘지 않는다.
판소리계에서는 지금까지 무주, 진안, 장수 지역에서는 단 한 사람의 소리꾼도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내가 아는 한에서도 가야금병창 국가지정 무형문화재인 강정렬이 안성, 진안 등지에서 살았고, 또 진안에서 가야금 공부를 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강정렬도 출신은 남원이었다. 그런데 김정문은 출생지가 진안인 것이다. 이제 진안 지역도 판소리사에 편입되어야 한다.
김정문은 송만갑에 비해 훨씬 멋과 구성이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소리는 송만갑의 소리에 비해 기교가 많다. 이는 김정문이 판소리 창자로서 크게 성공하기 전에 서편제 판소리 창자인 김채만의 소리를 듣고 반하여, 김채만을 여러 차례 찾아가 김채만의 소리 기교를 배웠다는 일화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김소희 명창은 김정문의 소리에 기교가 많은 이유를 송만갑보다 연하고 가벼운 목을 이유로 든 바 있다. 김정문이 소리꾼으로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판소리가 대중화의 길로 들어선 때였다. 당연히 판소리는 대중들의 취향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김정문 또한 그러한 대중들의 기호에 맞춰 나가는 과정에서 기교적인 소리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정문의 소리는 송만갑의 소리보다도 훨씬 더 통속적인 소리라는 평가를 받는다.
송만갑은 가끔 손을 들 뿐 거의 뻣뻣이 서서 소리를 했는데, 김정문은 발림을 아주 구성지게 잘했다고 한다. 연기도 잘해서 창극에서 춘향모 역할을 맡으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나가서 여자처럼 연기를 했다고 한다. 또 <심청가> 를 부를 때는 장님 흉내를 그렇게 잘 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심청가>
김정문은 아편 중독자였다. 강도근의 말에 의하면, 김정문은 아편에 중독이 되어 몸을 거의 씻지도 않고 지냈으며, 잠을 잘 때는 발바닥을 간지려주어야 잠이 들었다고 한다. 김정문은 아편 때문에 징역을 살기도 하였다. 남원시 주천면에 있는 일제강점기 기록에 김정문은 1930년 아편 단속에 적발되어 한 달 반의 징역을 산 것으로 나온다. 김정문이 아편 중독자였다는 사실은 증언으로도, 기록으로도 확인이 되는 것이다.
아편 중독 때문인지는 몰라도 김정문은 서울 관훈동에서 48세로 스승인 송만갑보다도 5년이나 먼저 사망하였다. 이때 사망을 신고한 이가 동거인으로 되어 있는 엄금주였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아마도 관훈동 요정의 주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당시 양해인이라는 부자 한량이 남원 주천까지 김정문의 시신을 운구하여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정문의 묘는 남원군 주천면 상주마을 뒷산에 있다.
김정문의 수제자는 남자로 김철원, 여자로 박록주를 쳤다고 한다. 김철원은 김정문보다도 더 소리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중간에 성대를 상해 소리를 중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정문의 소리는 박록주와 강도근이 잇게 되었다. 남원 사람들은 김정문이 5년만 더 살았어도 남원에 명창이 훨씬 많이 나왔을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김정문의 이른 죽음이 안타깝다는 말일 것이다.
/최동현(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바로잡습니다.
지난 주 내용 중'장재백의 누이동생 장주이의 아들인 유성준'은'장주이의 남편'으로 바로잡습니다. 따라서 유성준은'장재백의 생질'이 아니라'장재백의 매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