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데미트는 청중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창작세계만 주장하는 당시의 음악경향을 비판했다. 소리가 들리는 한, 진동을 느끼는 한, 소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한 존재하는 음악! 음악은 음악가들만의 음악이 아니라 인간의 삶, 일상생활 속에 있어야 하는 음악이라고 주장했다. 9살 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힌데미트는 바이올린은 물론 비올라, 클라리넷, 피아노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열일곱살 때부터는 작곡도 시작했다. 바이올린 실력이 훌륭해서 프랑크푸르트오페라오케스트라 리더를 맡기도 하지만 군무(軍務)를 자원했던 아버지가 플랑드르에서 세상을 뜨자 가계를 돕기위해 카페 악단에서 연주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음악 경험이 그를 일반 청중과 소통할 수 있는 음악, 실용음악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당시 주된 음악 흐름이던 무조음악, 12음음악 등 청중에게 난해한 기법적 음악은 청중과 공유해야 하는 음악의 사회적 본분을 저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의 음악은 어떤 식으로든 조성감을 느낄 수 있고 기법, 형식도 전통적 푸가양식을 현대적으로 변화시켜 도입하는 등 청중이 친하게 느낄 수 있는 고전주의 음악을 따르고 있다. 베를린 음악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기도 한 그는 1933년 나치정권이 들어선 후 나치정권이 그의 음악을 '문화적 볼셰비즘'이라며 박해하자 조국을 떠나 미국의 예일대학, 스위스의 취리히대학으로 옮겨다니며 교육과 함께 활발한 작곡활동을 하여 20세기 작곡가 중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의 하나로 자리매김 하였다.
20대 후반에 쓴 그의 한 편지는 그가 지향하는 음악세계를 엿볼수 있게 한다.
"근래 몇 년동안 음악회를 위한 작품을 쓰지 않고, 거의 교육적 또는 사회적 경향의 음악만을 작곡하였다. 즉 애호가를 위한 음악, 어린이를 위한 음악, 라디오 음악, 메카니즘 악기를 위한 음악 등등. 이러한 종류의 음악이 나는 음악회용 음악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음악회를 위한 음악은 단지 음악가를 위한 기술적 과제를 보일 뿐이며, 음악의 계속적 발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오희숙의 「20세기 음악 1」).
힌데미트는 그의 주장대로 음의 사용방법은 현대적인 새로운 주법이지만 연주는 기교가 어렵지 않아 초보자도 할 수 있는 「기악합주를 위한 학교용 작품」이라는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고, 어린이들이 간단한 반주와 함께 노래할 수 있는 '우리 함께 마을을 만들어요(Wir bauen eine Stadt·1930)'라는 일종의 음악촌극, 노래극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는 새로운 음악에 대한 주장에서 음악의 사회적, 윤리적 책임을 강조했고 그와같은 관점에서의 음악교육에 대해서도 많은 의견을 발표했다.
/ 신상호(전북대 음악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