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다시 시작한다는 것. 정선·강원도·진도 아리랑 등과 함께 사쿠라(일본), 클레멘타인(미국), 등대지기(영국) 등'아리랑'적인 요소를 담은 세계의 곡을 모두어냈다. 여기서 '아리랑'적인 요소를 담은 곡이 무엇일까 잠시 고민했다. 역경과 슬픔을 승화시키는 한 민족의 소리로 해석했다. 그런 점에서는 무난한 연결이었다.
두번째, 다시 시작한다는 것. '더 아리랑'은 부끄러웠다. 전북은 국악의 고장이다. 수없이 눈물의 고개를 넘어야 했던 '아리랑'을 들어온 터다. 트롯트 가수들이 부른 과장된 '아리랑'은 철 지난 '7080 콘서트'를 떠올리게 했다. 아마추어 수준에 그치는 합창단이나 느닷없이 등장한 아프리카 공연단의 북 연주는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무대 기획의 황량함과 빈곤함에 대해 다시 한 번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세번째, 다시 시작한다는 것. '더 아리랑'은 달랐어야 했다. 공연은 만드는 제작자와 보는 관람자 사이의 대화다. 하지만 이번 무대는 만드는 것에만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연습 부족으로 무대에 오른 몇몇 가수들은 가사를 잊어버리기까지 했다.
우리가 위대한 혹은 의미있는 작품을 만들 때 위대한 혹은 가치있는 생각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찮은 작품을 만들 때 우리 자신도 격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왜 '더 아리랑'을 만들었는가. '아리랑'은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어쩌면 미래의 자화상이어서다. '더 아리랑'은 그 물음에서부터 다시 시작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