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란 하나의 산(山)을 갖는 것이다. 봉우리에 자신이 외롭게 있다. 조각가 국경오(46)가 전북에서 낯선 이름이 된 것도 지역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한 결과일 것이다.
세계 3대 아트페어 중 하나로 평가받는 스위스의 '2011 바젤 아트페어(15~19일)'와 함께 열리는 '2011 바젤 스코프 아트페어'에 내놓을 작품의 마무리 작업에 그는 잠 잘 시간도 모자랐다. 돌이켜 보면, 결혼 후 가족들과 휴가 한 번을 못 갔다. 작품에 대한 강박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 아트페어에서 성과란 건 없었다. 아트페어 한 번 나가는데 수천 만 원씩 쏟아 붓고도 그는 덤덤했다.
"해외 미술시장에서 인정받고 싶은 거죠. 조각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전북에서도 무명이었고, 한국에서는 더욱 무명이었죠. 하지만 세계무대에 가는 것만으로도 기회라 여기는 겁니다. 그게 나를 담금질 하니까요."
그는 이번에 완벽한 양각과 음각의 조화로 입체적인 조각의 모든 걸 보여주는 작품'관계'를 시도했다. '2010 화랑미술제','ISF 서울국제조각페스타 2011'를 통해 시행착오를 거쳤다. 작품에 대한 설레임이 다시 찾아왔다. 오랜 만이었다.
원광대 재학 시절 평생의 스승인 배영식 전 원광대 교수가 "여기서 작가가 한 명만 나와도 성공"이라고 했을 때 "반드시 내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5년만 파고 들면 최고의 조각가가 될 수 있다고 믿던, 자신감이 충만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5년이 대충 흘러갔어요. 로댕의 힘과 달리의 초현실주의에 매료 돼 작품을 했는데, 잘 안 됐죠. 30대가 되니까 소박한 게 끌리더라구요. 인체의 순수한 조형성을 보여주는, 자연과 닮은 서정적인 돌조각을 했습니다. 32세부터 작품이 본격적으로 팔렸어요. 미국 전시로 자신감이 떨어져 더 이상 작품을 안했지만."
여기서 '작품'이란 새로운 시도를 뜻한다. 그는 "당시 작업실에는 만들어놓은 모형이 꽉 찼다"며 "주문 혹은 아트페어를 위한 작품만 쉴새없이 했다"고 털어놨다.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힘들었어요. 자기 소모적이었으니까. 마치 내가 물건을 찍어내는 기계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두운 기억이 그의 깊은 뿌리가 됐다. 작가에게는 세찬 바람에도 자신을 지탱해주는 깊은 뿌리가 필요하다.
그가 현재 도전하는 작업은 극사실·추상 조각의 접목, 양각과 음악의 조화로 새로운 형상성을 표현해내는 것이다. 때로는 허파꽈리를 졸아붙게 하는 것 같은, 때로는 얼굴에 깊은 고랑을 만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생명력 있는 작품을 내놓고 싶다.
"이제 빠듯이 기어나와서 2류쯤이나 왔을까요. 겸손의 말이 아니라, 이게 현실입니다. 아직도 내 작품이 없거든요. 완전한 창작이란 건 없다지만, 그래도 노력할 겁니다."
익산에서 태어나 원광대·한남대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한 그는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키아프, 마니프, 마이애미 아트페어 등 국내외 아트페어에 43차례나 참가했다. 한국 현대 미술제 청년 작가상, 한국 미술대전 최우수상, 한국 미술정예작가상, 한국미술 문화상 등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