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시류에 젖지 않은 정진…어느새 무르익은 글씨

서예가 우관 김종범 선성 7번째 개인전

서예가 우관 김종범 선생(73)은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다. 서예술은 멀고도 험한 예도의 길. 인간이 성숙해질 때 글씨도 무르익는다. 평소 과묵한 그답게 회고전을 열면서도 덤덤했다. 일곱번째 개인전으로 두툼한 서화집까지 함께 내놓았다.

 

 

"내 생애 전시는 7회만 하겠다고 했습니다. 고희 때 했어야 하는 건데, 좀 늦었죠. (웃음) 마음에 드는 명작을 담아내고자 했지만, 품격은 커녕 범속을 벗어나지 못해 늘 아쉬웠죠. 하지만 연암 선생의 예술창작론 중 가장 중심 이념인 '법고창신(法古創新)'을 깊이 새기면서 다시 붓을 잡고자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법고창신은 옛 것을 본받으면서도 융통성 있는 새 것을 만들자는 것이다. 선비 가문의 후예로 자란 그는 6세부터 '사자소학(四子小學)'을 읽고 틈틈이 붓 잡는 법을 익혔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붓을 놓기까지 소천 김하룡 선생을 모시면서 서예에 매진했다. 1971년 남정 최정균 선생(1924~2001)을 만난 것은 서예 인생의 전환점. 최정균 선생은 '평소 그를 일러 성실한 인품과 겸허한 몸가짐, 강건하고 고아한 자체(字體)로 정도를 지켜나가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거목의 성장을 확신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갑골문자, 중반에는 문인화에 대한 입체적 시도에 열정을 쏟았다.

 

1973년 제22회 국전에서 안진경의 쟁좌위첩의 임서(법첩을 따라 쓰는 것)로 첫 입선을 시작해 10년간 입선(7번)과 특선(1번)에 다섯 차례나 임서작을 냈다. 전서(篆書)를 비롯해 예서(隸書), 해서(楷書), 초서(草書) 등 일반적인 서체에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까지 두루 능한 그는 국전 초대작가가 돼서도 임서(臨書·법첩을 옆에 두고 따라쓰는 법)를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임서는 남의 글씨를 흉내내는 수준이 아니다. 서법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 글자의 특성을 집어내 쓰는 것. 이번 회고전에는 특히 오체별 임서를 통해 그간의 작업을 정리하는 데 의미를 뒀다. 웅혼함과 활달함, 또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필체를 두루 감상할 수 있다.

 

'정성은 스스로 이룸이요, 도는 스스로 행하는 것이다(중용 37장)'나 '스스로 이기는 자가 강하다(도덕경 33장)'는 우관 선생의 서예술 천착을 요약한 말이다. 남정 선생이 떠난 후에도 구도자로서 시류에 젖지 않고 묵묵히 정진해 더 깊고 심오한 서체를 드러냈다. 평소 자연과 벗삼아 온 그는 구이 모악산 자락에 작업실을 마련해 마음을 맑게 하는 서화를 일궈가고 있다. '도는 자연의 법칙을 본받아야 한다(도덕경 25장)'라고 했듯 그의 서예는 자연으로의 회귀다.

 

▲ 김종범 개인전 - 우관 회고전 = 1~7일 전북예술회관 1~2 전시실. 개막식 2일 오후 5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