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로 착각할 법한 수많은 유색 판화가 전시돼 있었으나, 피카소 원작이 주는 아우라에 비견할 바가 못 되더라."
전북도립미술관(관장 이흥재)이 24일 막을 내린 세계미술거장전 '나의 샤갈, 당신의 피카소'에서 16만 여 명의 관람객들의 눈을 가장 많이 붙들어 놓은 작품은 피카소의 '앉아있는 남자와 누드'였다. 400억 대로 추산되는 고가의 작품 가격 덕분이기도 하거니와 원작이 전하는 거친 붓놀림과 화려한 색감이 주는 묘한 끌림이 통했다는 평가.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 열린 비슷한 콘셉트의 해외미술거장전을 본 이들이라면, "타이틀에 낚였다"면서 원작이 주는 짧은 감동에 실망했다는 이야기도 적지 않았다. '박수'와 '비난' 사이에 놓였던 전북도립미술관의 세계미술거장전은 그러나 지역 미술계에 숱한 화제를 남기면서 선방했다.
일단 '첫 번째 박수'는 해외미술 대여전 경험이 전무후무한 지역 미술관이 대전시립미술관의 '모네에서 워홀까지'나 서울시립미술관의 '모네에서 피카소까지' 등이 열린 것과 비슷한 콘셉트로 짧은 시간 안에 세계미술거장전을 성사시켰다는 점이다. 대형 기획사가 주도하는 다른 지역의 세계미술거장전의 경우 미술관의 역할은 대관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도립미술관은 유럽이 아닌 남미로 눈을 돌려 해외미술 대여전을 타진하고 가치 있는 미술품을 가져올 수 있도록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경험을 쌓았다. 교육을 받은 뒤 박물관 미술관 등에서 전시에 관한 이해를 돕는 '도슨트'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도 뒤늦은 감이 있긴 하나 새로운 경험이 됐다.
'두 번째 박수'는 대외적 홍보다. 서울·부산·대전 등과 비교해 접근성이 떨어지는 도립미술관이 세계미술거장전으로 16만 여 명의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들 수 있었던 것은 대외적 홍보에 관심을 쏟은 결과다. 김완주 도지사를 비롯해 도내 지역 시장·군수 대부분이 다녀갔고, 전주지방법원장·전주지방경찰청장 등 각급 기관장들도 전시장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미술계에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꼽히는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은 물론 프랑스 상뜨티엔 로랑 헤기 관장 부부, 이종협 대전시립미술관장, 황영성 광주시립미술관 관장, 김현숙 제주시립미술관장 등도 세계미술거장전을 감상했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미술거장전 덕분에 전북도립미술관의 인지도가 높아졌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지난해 미술계 인사 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올해 놓쳤더라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한 전시에 '나의 샤갈, 당신의 피카소'가 아닌 '채용신과 한국의 초상미술전'이 7위에 올랐다. 도립미술관 내부 인력이 아닌 외부에서 기획력을 빌리긴 했지만 전북에서 활동했던 초상화가 채용신을 재조명함으로써 "초상 미술의 미학적 전통을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북도립미술관이 올해 세계미술거장전을 재추진할 계획이어서 논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세계미술거장전이 '2012 전북 방문의 해'에 맞춰 대형 이벤트로 추진된 점을 감안하면 올해 세계미술거장전 재추진 명분은 약해 보이는 데다, 국공립미술관이 상업적 목적의 전시를 위한 대관 전시장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된다는 반론이 있어서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상업적 목적의 전시가 반드시 잘못되었거나 나쁜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조직되고 작동되며 그 기획 과정에 대한 꼼꼼한 반성과 점검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박천남 서울 성곡미술관 학예실장(前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실장)은 "모든 블록버스터 전시를 미술관이 다 기획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외부의 우수한 기획 혹은 게스트 큐레이터에게 전시 기회를 제한적으로 주는 것도 공립의 역할 중 하나라 할 수 있다"면서 "다만 그 횟수 제한과 내용 검토에 대한 내부의 엄격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특정 기획사에 의한 대형 전시가 이어지면서 미술관 내부 전문 인력이 기획한 전시는 취소되거나 제한된 공간에서 이뤄지는 등 고유 기능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충고했다.
도립미술관 예산이 부족하다는 불만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는 점을 볼 때 지역 정체성을 살리면서도 공공성과 전문성을 높이는 전시 기획과 소장품 구입이 먼저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미술경작전'의 경우 대전 충청 지역에 기반을 두거나 연고 작가로 주목 받는 40대 작가들을 초대해 그들의 제작 의도를 읽어내고 현대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지역 공립미술관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공성과 전문성을 높여 미술관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작품을 기증하고 싶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중요하다. 전시든 컬렉션이든 교육이든 미술관 운영은 매우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일"이라는 일각의 지적을 감안하면 학예실장(1명)·학예연구사(3명, 1명 육아휴직) 등이 4명에 불과한 전북도립미술관의 경우 앞으로 무엇을 우선 순위에 둬야 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흥재 관장은 "이번에 도립미술관이 입장료 수입(8억5000만원)은 또 다른 세계미술거장전으로 추진하지 않으면 다른 기획전 혹은 소장품 구입 명목으로 재투자될 개연성이 적어질 것"을 걱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