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자를 보고 북을 치는 고수들도 박자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헛박을 다루지 못해 곤혹을 치르는 경우가 왕왕 있으나 앞이 보이지 않는 그의 고충과 비교할 수 있을까. 더욱이 좋은 고수를 만나야 명창이 될 수 있다는 '1고수 2명창'이라는 말처럼 고수가 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판소리에서 고수는 단순한 반주자가 아니라 창자의 장단을 맞춰주며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는 주도적 역할.
"그런데 볼 수 없다는 건 고수로서 치명적이죠. 판소리는 악보가 없기 때문에 보통 고수들은 명창들의 입을 보고 장단을 맞추지만 저는 볼 수 없으니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 '감각'은 결국 몸부림치며 반복해온 연습에서 나왔다. 원하는 음색을 내기 위해 북을 제대로 때리는 법부터 창자와 호흡을 맞추는 법까지 그가 넘어야 할 산은 너무 많았다.
"일단 어떤 소리건 끝까지 들었어요. 모든 유파의 소리는 외웠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떤 창자건 첫 장단을 들으면 대충 '감'을 잡죠. 소리와 호흡의 흐름이 어느 정도 계산이 돼요."
어릴적 그의 아버지와 큰 아버지는 판소리 전공자는 아니었으나 비가비(조선 후기 학식 있는 상민으로 판소리를 배운 사람) 중 소리를 잘하는 한량에 가까웠다. 이 영향으로 그는 눈만 뜨면 이일주·최난주 명창의 소리를 듣는 남 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컸다.
하지만 그는 16세 때 합기도를 하다가 망막을 다쳐 거듭되는 수술 휴우증으로 완전히 앞을 볼 수 없게 됐다. 생을 끊고픈 지독한 방황 끝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준 것은 판소리. 학창 시절 부모 몰래 명창들을 찾아가거나 용돈을 모아 학원을 다니던 그에게 어른들은 소리는 배고픈 직업이라며 말려 접었던 꿈이었다.
여기서 그는 명창이 아니라 고수의 길로 정했다. 기왕이면 더 어려운 것에 도전해보고픈 '오기'가 발동한 것.
물론 그를 반기는 스승은 거의 없었다. 유명한 고수들은 처음엔 받아들였다가도 박자를 맞추거나 북의 다양한 박자를 치지 못하면 그를 먼저 포기했다.
그러나 고수 김청만 선생은 달랐다. 선생은 "앞을 못보는 이를 가르쳐본 적은 없으나 한 번 해보자"며 응원했고, 여기서 희망의 끈을 발견한 그는 하루에 10시간 이상 북을 치며 꿈에서도 북채를 놓지 않는 집념으로 버텼다.
"고수와 창자는 무대에서 삼라만상의 모든 소리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소리가 게 없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습니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놓인 장벽을 허무는 무대.
30주년을 맞았던 KBS 라디오'내일은 푸른하늘'에서 안숙선 명창과 난생 처음 호흡을 맞췄던 경험을 통해 그는 장애가 있어도 서로 깊이있게 교감하는 무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다양한 유파로 나뉘어져 첨예하게 갈등하는 판소리계가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결국 음악은 어떤 장애물도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