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한지 공방에는 낯선 풍경이 하나 있다.
종이를 사러 오는 사람보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더 많다는 점이다. 공방 안에는 한지를 바른 조명과 생활소품, 색색의 공예품들이 놓여 있지만, 그것들은 이제 생활필수품이라기보다 ‘전통문화 체험’의 대상으로 소비된다. 한때 삶 속 가장 가까운 재료였던 한지는 어느새 일상 밖으로 밀려난 듯 보인다.
하지만 공방을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다른 장면들도 눈에 들어온다. 한지를 찢어 붙이며 수업을 듣는 아이들, 조명의 은은한 빛을 만져보는 관광객들, 한지 질감을 활용한 디자인 소품들. 한지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생활 안에 남아 있었다.
전주에서 20년 넘게 ‘금홍 공방’이라는 한지 공방을 운영해온 김경철 공예인은 “예전에는 만들면 바로 팔렸다. 지금은 한지를 사러 오는 사람보다 체험하러 오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부터 한지 조명과 생활소품을 만들어왔다. 처음에는 생계를 위해 시작했지만, 오랜 시간 한지를 다루며 생각도 달라졌다고 했다.
김 씨는 “처음에는 먹고살기 위해 시작했다. 그런데 하다 보니 한지가 단순한 공예 재료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며 “이제는 우리 문화의 자존심과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공방 한쪽에는 오래된 나무와 버려진 플라스틱 포장 용기에 한지를 입힌 조명들이 놓여 있었다. 그는 “버려지는 재료에 한지를 입혀 새로운 생활소품으로 만드는 작업을 오래 해왔다”며 “한지는 생각보다 훨씬 활용 범위가 넓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한지는 한때 생활 그 자체였다. 창호지와 책, 문서뿐 아니라 바구니와 상자, 등과 생활용품까지 사람들의 일상 곳곳에 쓰였다. 종이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산업화와 대량생산 체계가 자리 잡으면서 한지는 점차 플라스틱과 공산품에 자리를 내줬다. 싸고 빠르게 생산되는 재료들이 생활을 채우기 시작했고, 한지는 전통공예나 문화재 복원 영역 안으로 밀려났다.
생활문화의 변화도 컸다. 과거에는 집 안을 장식하고 꾸미는 문화가 활발했지만, 최근에는 단순하고 미니멀한 인테리어가 대세가 됐다. 한지 조명과 공예품을 납품하던 고급 가구점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김 씨는 “예전에는 벽에 작품을 걸고 조명을 두는 문화가 있었는데, 지금은 최대한 비우는 분위기로 바뀌었다”며 “그러다 보니 한지 공예품 시장도 자연스럽게 축소됐다”고 말했다.
판매 중심이던 공방은 자연스럽게 체험 중심 공간으로 바뀌었다. 학생 체험학습과 관광객 프로그램이 늘었고, 최근에는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예술교육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그는 “한지를 찢고 붙이며 색감과 질감을 느끼는 활동 자체가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한지가 생활에서 멀어졌다는 말은 어쩌면 절반만 맞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형태는 달라졌지만 한지는 여전히 사람들의 감각 가까이에 남아 있었다. 조명과 디자인, 인테리어와 공예, 교육과 치유 프로그램까지 한지는 새로운 방식으로 생활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실제 공방을 찾는 젊은 세대의 반응도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낯설어하지만 직접 만져보고 사용해본 뒤 생각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김 씨는 “한지 조명은 일반 조명보다 빛이 훨씬 은은하고 부드럽게 퍼진다”며 “직접 사용해본 사람들은 대부분 다시 찾는다. 눈이 편하고 공간 분위기도 달라져 결국 써봐야 그 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러한 가능성이 아직 산업 전체를 지탱할 만큼 충분한 규모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지를 만드는 일은 시간과 노동이 많이 드는 데다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갖추기도 쉽지 않다. 후계자 부족 문제 역시 현장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다.
그는 “저 역시 생계를 위해 시작했지만, 지금 한지 시장은 젊은 친구들이 와도 오래 버티기가 쉽지 않은 구조”라며 “결국 생활이 돼야 하는데 아직은 그 기반이 약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지가 다시 생활 속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단순히 전통을 보존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책 지원과 연구개발, 생활 속 활용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지가 가진 친환경성과 질감, 빛의 특성은 지금 시대에도 충분한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김 씨는 “한지는 원래 가진 특성이 굉장히 좋다. 질기고 오래가고 친환경적이기도 하다”며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걸 지금 시대의 생활 안에서 어떻게 다시 쓰이게 하느냐”고 강조했다.
전주는 오랫동안 한지의 도시였다. 종이를 만드는 기술과 사람, 문화가 이 지역 안에 축적돼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한지는 과거의 영광만으로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다. 박물관 안에 보존된 문화유산만으로는 기술도 산업도 이어가기 어렵다.
결국 한지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보다도 생활 속 자리 하나인지 모른다. 누군가의 방 안 조명이 되고, 손끝의 공예 재료가 되고, 다시 일상 가까이에 놓일 때 한지는 비로소 ‘현재의 종이’로 남을 수 있다.
천년을 견딘 종이.
이제 그 종이는 다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