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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 부활 30년, 전북 지방자치 발자취와 미래] ③ 지방의회 위상 · 권한 강화의 역사

지방의회 위상을 높이고, 제도 운영의 실효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꾸준히 이뤄졌다. 지방자치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 1988년 지방자치법이 전부 개정된 후 최근까지 30여 차례의 법 개정은 지방의회의 위상과 권한을 강화해 나간 역사다. 그 과정에서 무보수 명예직에서 유급제로 변경하며 전문성을 갖춘 인재의 의회 진출 길을 열어간 일은 지방의회의 큰 변화로 꼽힌다. 특히 올해는 지방자치의 새로운 전환점을 앞두고 있다. 지난 2020년 12월 전면 개정된 지방자치법이 오는 2022년 시행을 앞두면서,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이 더욱 신장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초기 전북도의회 모습을 통해 지방의회 위상과 권한 강화의 모습을 돌아봤다. /편집자 주 지방자치 부활 초대(4대) 의회를 거치면서, 지방의회는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도지사와 시장군수, 도의원과 시군의원 선거가 동시에 치러진 5대 의회부터는 본격적인 민선 지방자치 시대를 열었다. 1995년 제1기 민선 정부가 들어서면서 지자체장과 지방의원 모두 주민의 손에 선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대 의회와 마찬가지로 5대 의회 또한 집행부와의 갈등과 대립이 이어졌고, 의원들의 도덕성이나 전문성 결여 등 자질 시비는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기초의회에서 더욱 빈번히 불거졌다. 시군의원에 대한 당시 인식 자체가 주민들뿐 아니라 의원들 사이에서도 명확히 정립되지 않았던 것을 대변하듯 현재 위상에는 못 미치는 모습이었다. 집행부에 대한 지방의회의 감시견제 역할과 영향력은 본격적인 제도 정비를 통해 점차 더욱 커져갔다. 본격적인 제도적 정비가 이뤄진 것은 6대 의회부터다. 지방의원의 정수를 축소 조정하고, 상하반기 연 2회 정례회 제도를 도입하는 등 많은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졌다. 특히 전주세계소리문화전당 공사 관련 등 특별위원회 구성이 많아 특위 의회라고 할 만큼 집행부와 긴장 관계가 대단했던 시기가 이때다. 2000년대 들어서는 지방자치법이 본격적으로 개정되기 시작하면서 지방의원의 위상도 점차 강화되기 시작했다. 7대 의회때 지방의원에 대한 유급제가 도입돼 전문성을 갖춘 인재의 의회 진출 길을 열었다는 평가다. 조례 제개정, 예산심의, 행정사무감사 등 집행부 감시견제 역할과 주민 의견이 반영된 정책을 현실화하는 현재의 지방의회 기틀은 이때부터 본격화됐다. 또 전문위원제를 확대해 의정활동 지원을 강화하면서 대를 거듭할수록 의회의 질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세웠다. 이후에도 단체장에게 서류 제출 요구 조항 신설, 행정사무감사 관련 조항 신설 및 강화, 전문위원 조항 신설, 개폐회휴회 및 회기 등의 지방의회 의결로 자주적 결정, 연간회의 일수정례회임시회의 회기 등은 조례로 정하도록 개정 등의 제도개선이 이뤄졌다. 특히, 비례대표제가 도입된 5대 때 강예순(민자당), 고영자(민주당) 두 여성 의원이 처음 탄생했고, 7대 때 박영자 의원(전주)이 첫 선출직 여성의원으로 등원하기도 했다. 지방의원과 의회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지방의원들에 대한 유급제다. 무보수 명예직이던 지방의원에 대해 2002년에는 신분 규정을 삭제하고 회기 수당을 보수로 지급할 수 있도록 했다. 이어 2005년에는 다시 한번 지방자치법이 개정돼 지방의원에 월정 수당을 지급하도록 변경됐다. 지방자치에 대한 지방의원의 위상과 역할을 인정하고 그들의 생활기반을 보장하면서 지방의회 의정 활성화와 부패 방지에 기여하도록 했다. 어려운 지방재정 상황에서도 각종 이권에 개입하지 말고 지방 살림 전반에 대해 주민을 대신해서 꼼꼼히 살펴달라는 의지가 담겼다. 유급제 도입 이후 의정비는 소폭으로 꾸준히 증가해 현재는 전북도의원의 경우 5000만 원 중반, 시군의원의 경우 3000만 원 초반부터 4000만 원 중반까지 상승했다. 지난 2021년 2월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2021년 지방의회 의정비 결정 결과에 따르면, 전북도 14개 시군 가운데 가장 많은 의정 활동비를 지급하는 곳은 의원 수가 34명인 전주시로, 1인당 4440만 원을 받는다. 다음으로는 전국 군 단위에서 의정비 1위를 기록한 완주군으로, 11명의 의원이 인당 4153만 원을 받는다. 전북도의원 연봉은 5570만 원으로, 3770만 원이 월정 수당, 1800만 원이 의정 활동비다. 이는 지난해보다 103만 원 오른 수치지만, 전남, 강원도에 이어 세 번째로 낮은 금액을 받는다. 유철갑 전 도의장이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의정보고서를 보며 설명하고 있다. /사진 = 천경석 기자 전북일보는 집행부 견제와 주민 본위라는 지방의회의 제역할을 다했다고 평가받는 유철갑 전 전북도의회 의장을 만났다. 전북 의정사에 남을 새만금 삭발 투쟁이나, 집행부를 향한 강한 견제 모습 등 전북 정치사에 빼놓기 힘든 인물이다. 부활한 초대 의회인 4대부터 7대 의회에 이르기까지, 4선을 지낸 유철갑 의장의 집행부를 향한 강한 드라이브는 지금도 회자한다. 지난 2002년부터 2년간 7대 의회 전반기를 이끌었던 유철갑 의장은 의장 재임 기간 다양한 특위들을 양산하며 집행부와 팽팽한 긴장 관계를 가졌다. 활동이 소홀한 의원에게는 집행부 장학생이라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특히 법원의 새만금 물막이 공사중단 결정에 의장을 포함 20여 명이 서울 여의도에서 삭발식을 가진 것 또한 전북 의정사에 남을 기록이라는 평가다. 유철갑 전 의장은 집행부와 각을 세우고, 제역할을 하지 못하는 의원들에게 쓴소리했던 것은 우리(도의원)가 주민 대표로 선출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면서 의원의 사명은 집행부의 잘못을 지적하고 개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새만금과 관련한 여의도 삭발 투쟁을 두고, 이때부터 집행부나 지역 국회의원들이 도의원들을 무시하는 처사가 많이 줄었다면서 당시에도 환경단체나 시민단체들의 눈치를 보며 소극적인 의원이 많았지만, 지금처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유 전 의장은 현재 지방자치 상황을 변혁기라고 평가한다. 특히 지방자치 발전을 위해서는 국가 예산의 배분, 분배가 중요하다고 꼽는다. 종국적으로는 국세의 많은 부분을 지방으로 이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가장 아쉬운 부분으로 지방의원 보좌관 제도를 완성하지 못한 점을 꼽는다. 당시 유급제는 이뤄졌지만, 의정활동을 위한 전문인력 확보는 이뤄지지 못했다. 이러한 꿈은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한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에 따라 내년부터는 정책지원 전문인력 확보가 가능해졌다. 유 전 의장은 의정활동을 도울 전문인력이 있다는 것은 의원들 활동에 큰 힘이 되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시민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지방자치법 개정에 따라 제도가 만들어진 것은 괄목할만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후배 의원들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유철갑 전 의장은 의원은 주민들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라며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말고, 주민과 도민만을 보고 활동하라고 강조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천경석
  • 2021.07.29 17:28

[문화&공감 2021 시민기자가 뛴다] 부채와 지우산 장인이 모두 있는 전주

문화유산이 건강히 전승되려면 크게 세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 첫째, 질 좋은 재료가 공급되는 환경, 둘째, 정교한 솜씨를 가진 장인, 셋째,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수요이다. 이 세 가지를 고루 갖춰 발전한 것이 전주 한지라 할 수 있다. 전주는 깨끗한 물이 계속 공급되는 흑석골을 중심으로 한지장이 모여 살았고, 문예를 즐기는 양반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또한 완판본을 포함한 독서문화, 예인들의 예향문화 등이 두터운 곳이다. 이처럼 안목 높은 향유층들이 많다보니 다양한 종류의 고품질 한지가 많이 제작될 수밖에 없었다. 한지는 닥나무와 황촉규 그리고 물의 배합으로 만들어진다. 따뜻한 남쪽의 특성상 닥나무와 황촉규 공급은 어렵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다. 물이 깨끗해야만 좋은 품질의 종이를 뜰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흑석골 공수내이다. 공수 뜻이 물이 차고 넘친다는 뜻이다. 그만큼 공수내는 깨끗한 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자연히 흑석골 사람들은 공수내를 중심으로 한지공장을 차렸고 한지 뜨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현재는 복개공사로 인해 공수내가 추억 저편으로 남게 되었으나, 1980년대만 하더라도 전주 흑석골하면 전주 한지를 떠올렸다고 한다. 전주시는 전주 한지의 명맥을 이을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7년에 천일한지 김천종, 용인한지 김인수, 전주전통한지원 강갑석, 성일한지 최성일을 전주 한지장으로 지정했다. 모두 30년 이상 전주 한지 제조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장인이다. 2021년 4월에는 한국전통문화전당에서 전주 한지장 후계자 양성을 추진하고 있다. 기원전 중국 한나라(漢代)부터 부채(扇)와 우산(傘)은 가장 존귀한 존재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휘장 아래에 부채를 들고 앉아있는 묘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비단이나 종이로 부채와 우산을 만들어 행렬에 가장 중요한 사람과 동행한다. 부채와 우산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세분화된 공예품이다. 귀족의 상징과 같은 부채와 우산을 만드는 장인이 모두 전주에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선차장 김동식 전라감영이 유지됐던 192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선자장은 중앙동 전라감영을 주축으로 활동하였다. 전라감영이 없어진 이후 다수의 선자장은 인후동 가재미마을로 이전하였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김동식 보유자 또한 가재미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선자장 김동식의 핏줄은 외가에서 비롯되었다.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모두 평생 부채를 만들던 장인이었다. 농한기에 외삼촌이 부채를 만드는 것을 보고 김동식은 조금씩 따라하였다. 이를 본 외삼촌이 너 솜씨가 있구나하고 칭찬하였고 14살부터 본격적으로 배웠다고 한다. 부채가 한창 잘 나갈 때는 1년에 3천만 원, 5천만 원씩 벌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선풍기와 에어컨이 나오고 나서 부채로 큰돈을 벌기란 쉽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 다른 일을 해야하나 깊은 고민의 시절도 있었다. 그 시기, 부채를 계속 하라며 금전적 지원을 해준 선배가 있었다. 그날부터 김동식은 악착같이 부채일을 하며 지금까지 오게 됐다고 회고한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나의 뭐를 믿고 돈을 줬을까 생각해요. 형제간에도 돈 빌리기 어려운 세상에서. 그 돈으로 악착같이 노력했어요. 그 돈으로 지금까지 오게 됐지. 선자장 김동식은 2007년에 전북무형문화재로, 2015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되었다. 2019년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에서 <합죽선, 60년>展, 2020년 전주부채문화관에서 <합죽선 대를 잇다>展, 2021년 교동미술관 <현존하는 가치>展과 용산공예관 <부채, 남실바람이어라>展 등 특별전을 이어가고 있다. 김동식의 바램은 한국의 전통기술 합죽선이 아랫세대에 잘 전승되는 것이다. 좋은 부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부채를 어떻게 하면 후세에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요. 김동식이 만든 부채는 아주 최고였다고 사람들이 기억해주길 바라지요. 우산장 윤규상 전북무형문화재 제45호 우산장 윤규상 보유자는 우산장들이 모여 살았다는 장재마을에서 지우산 만드는 법을 배웠다. 가까운 곳에서 일을 배우기 위해 자연스럽게 지우산을 만들기 시작했다. 17살부터 우산공장에 출근해서 우산을 만들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했다. 1965년 비로소 자신만의 우산공장을 차렸다. 그는 1980년대까지 지우산과 비닐우산을 생산하였다. 지우산의 핵심기술은 대나무를 다루는 기술이다. 대나무는 임산물에 속하기 때문에 그대로 들고 오면 검문소에서 잡았다고 한다. 검문을 피해 소가 끄는 수레에 대나무를 싣고 천변과 소양산을 지나 전주로 들어왔다. 대나무를 받으면 대를 쪼갠다. 우산 꼭지에 살대를 끼워 접었다 펼 수 있도록 조립한다. 그렇게 지우산에서 비닐우산까지 한국 우산의 변천사를 관통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우산이 대량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우산일을 접게 되었다. 그러다 약 17년 전, 한국에서 지우산이 잊히는 것을 알고 지우산 제작기술을 복원하기로 그는 결심하였다. 분업화로 이뤄졌던 것이라 한 사람이 온전히 습득하기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윤규상은 지우산 제작을 완성하였고, 2011년 전북무형문화재로 인정되었다. 2016년 재단법인 예올에서 <올해의 장인 우산장 윤규상>展, 2020년 전주공예품전시관에서 <입춘, 봄비 내리다>展, 2021년 교동미술관에서 <현존하는 가치>展을 통해 전통 우산을 알리고 있다. 그는 모든 과정을 도전과 실험으로 부딪혀 나아갔다고 회고한다. 매사 도전정신을 가지고 일을 하는 거 같아요.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찾고 개선해보자는 마음을 가지고 항상 일합니다. 지우산도 그렇게 복원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설지희 썰지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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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8 16:54

[참여&소통 2021 시민기자가 뛴다] 노인정치 vs 청년정치

(당 대표가 대선 관리를 하자면) 아무래도 이해를 조정하고, 또 중심을 잡고, 당력을 하나로 집중시켜야 하는데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문화가 있지 않습니까? 장유유서(長幼有序), 이런 문화도 있고 그래서 지난 5월 25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인 정세균 전 국무총리(71)가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한 말이다. 이 말은 당시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해 돌풍을 일으켰던 이준석 대표(36)에 대해 내놓은 답변이었다. 이와 관련, 이준석 대표는 페이스북에 다음의 글을 올렸다. 제가 말하는 공정한 경쟁이라는 것이 이런 겁니다. 시험 과목에서 장유유서를 빼자는 겁니다. 그게 시험과목에 들어 있으면 젊은 세대를 배제하고 시작하는 겁니다. 이들 논쟁은 고령화로 치닫고 있는 우리 정치권에 대한 청년정치의 반격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50년 전, 신민당 유진산 총재가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DJ, YS에게 구상유취(口尙乳臭)라고 한 말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정치의 고령화는 우리만의 풍경이 아니다. 우선 우리나라부터 보자. 문재인 대통령(68)을 비롯해 유영민 비서실장(70), 박병석 국회의장(69), 김명수 대법원장(62), 김부겸 국무총리(63) 등 주요 지도자들이 60-70대다. 또 내년 3월 9일 실시되는 대선 레이스에 뛰고 있는 여권의 정세균(71), 이낙연(69), 추미애(63)와 야권의 홍준표(67), 유승민(63), 윤석열(61), 최재형(65) 등도 마찬가지다. 이재명(57)만이 50대 후반이다. 얼마 전까지 여야를 이끌었던 이해찬 대표(69)와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81)의 나이를 합하면 150살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미국 역시 정치분야의 고령화 추세가 뚜렷하다. 미국 역사상 최고령의 바이든 대통령(80)이 취임했고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 공화당 및 민주당 상원원내대표 등이 모조리 70-80대다. 올해 1월 개원한 미국 117대 의회에서 상원의 평균 연령은 64세, 하원은 58세였다. 1981년 97대 의회에서 각각 53세와 49세였던데 비해 40년 만에 의회가 10년 늙은 셈이다. 이처럼 노년층이 사회전반을 장악해 기득권을 유지하는 정치체제를 서구에서는 노인정치(gerontocracy)라 한다. 노인이 지배하는 또는 노인을 우선시하는 정치체제를 비판적으로 일컫는 용어다. 일본에서는 정치학자 우치다 미츠루가 노년층의 정치적 목소리가 커지는 현상을 실버민주주의(Silver democracy)라 불렀다. 노인정치의 문제점은 사회가 보수화되고 성장과 역동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원인은 뭘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고령 유권자의 증가라는 인구구조의 변화요, 또 하나는 고령층의 높은 투표율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20대와 30대 유권자 비율은 각각 28.3%와 27.5%였으나 2020년 21대 선거에서는 각각 15.5%와 15.9%로 감소했다. 반면에 60대 이상 유권자는 1996년 13.4%에서 2020년 27.3%로 2배 이상 증가했다. 20대와 30대의 유권자는 급격히 감소하고 60대 이상 유권자는 급격히 증가한 것이다. 문제는 고령의 유권자 비율이 증가한데 더해 노년층의 투표율이 젊은층 보다 훨씬 더 높다는 점이다. 2016년 20대 총선의 경우 20대와 30대의 투표율이 각각 52.6%와 50.5%를 기록했다. 이에 비해 60대의 투표율은 71.7%로 20% 가량 더 높았다. 이는 청년층의 과소대표와 노년층의 과대대표로 나타난다. 21대 국회의원 300명 중 20대와 30대 의원은 각각 2명과 11명 등 모두 13명으로 전체의 4.4%에 불과하다. 반면 60대 이상은 72명으로 24%에 이른다. 이런 불비례성은 국회의 대표성을 왜곡해 각종 입법과 예산 등에서 고령층 위주의 결과를 낳게 된다. 일자리나 복지정책 등 자원배분에서 세대간 불균등이 나타나는 것이다. 수적 우위와 투표율이 높은 노년층의 압력으로부터 국회의원들이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이에 비해 유럽의 경우는 반면교사로 삼을만하다. 유럽은 한국이나 일본 미국과 달리 30, 40대 젊은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다. 유럽의 젊은 지도자로는 현직 최연소 국가수반인 제바스티안 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35)를 비롯해 핀란드 총리(36), 우크라이나 대통령(43), 프랑스 대통령(44), 덴마크 총리(44), 에스토니아 총리(44), 벨기에 총리(46), 룩셈부르크 총리(48) 등이 있다. 유럽에서 젊은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오래전부터 청년 정치인 육성 체계가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정당의 청년조직에 가입해 정치수업을 받아, 젊은 나이임에도 정당경력이 꽤 오래된 경우가 많다. 노인정치의 폐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소수 기득권을 가진 노(老)정객들의 잔치판이 아닌 노인 전체의 권익을 신장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4000만명의 회원을 지닌 미국은퇴자협회(AARP)는 막강한 영향력으로 주요 정치인들이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지만 은퇴자 스스로가 권력을 향해 달려가지는 않는다. 노년층의 권익을 지키는 일과 함께 은퇴자들을 대변할 젊은 정치인을 키우는데도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조상진 전 전주시노인취업지원센터장 세계적인 고령화 추세 속에 노인들의 이익을 지키고 대변하는 정당들이 결성돼 주목을 받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 20여개 국가에서 등장한 연금수령자 정당(Pensioners Party)이 그것이다(이현출문예찬, 2019). 19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이 정당들은 고령자 이익(Grey Interest)인 복지, 연금수령, 사회보장 등을 아젠다로 삼고 있다. 대표적 나라가 뉴질랜드, 슬로베니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등이다. 이들 나라의 연금수령자 정당은 전국적인 의회선거에서 의석을 확보하는 등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 중 네덜란드 50PLUS 정당은 2017년 선거에서 3.1%를 득표해 상원 2석과 하원 4석을 차지했다. 이 정당은 기존 정당들이 노년층을 2급 시민으로 비하한다면서 연금강탈 중지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다. 또 퇴직연령을 65세로 조정할 것을 의제로 상정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노인들에게 고정좌석제를 요구하고 있다. 뉴질랜드 제일당(New Zealand First Party)은 2017년 총선에서 정당득표율 7.2%로 9명의 비례대표를 배정받아 제3당으로 부상했다. 노동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으며 고령자 복지와 반이민정책을 표방하고 있다. 슈퍼골드(SuperGold)카드 발급을 공약했는데 고령자와 퇴직군인들의 사회공헌에 보답하는 뜻에서 대중교통 무료이용과 할인 등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연금수령만을 내세우는 단일 이슈정당인 룩셈부르크 대안민주개혁당(ADR)은 소득대체율이 급여의 5/6에 해당하는 연금지급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 정당은 조직화를 통해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일부에선 기성정당들이 이슈를 포괄함으로써 흡수 통합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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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6 16:47

[뉴스와 인물] 조준호 새만금도민회의 대표 “새만금, ESG 실현 최적화된 공간”

새만금도민회의 조준호 상임대표가 새만금이 ESG 실현에 최적화된 공간이라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라도 기업들의 이전과 투자이 이어져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사진 = 오세림 기자 새만금 사업이 1991년 11월 16일 첫삽을 뜨고 30년이 지났지만, 개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로 인한 전북도민들의 피로감이 극에 달했을 때, 정부는 새만금을 그린뉴딜과 신산업 중심지로 변모시키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새만금에 대규모 재생에너지 단지와 국내 최초 RE100 산업단지를 만든다는 내용이다. 새만금 수변도시도 조성해 새만금 사업에 대한 국민적 체감도를 높이겠다고 했다. 이와 맞물려 새만금을 ESG 대표 모델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 선두에 조준호(63) 새만금도민회의 대표가 있다. 새만금 사업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그가 말하는 새만금 ESG 운동의 비전과 과제는 무엇인지 들어봤다. *ESG는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머리글자를 딴 말이다. 친환경 경영, 사회적 책임 경영, 지배 구조 개선 등을 고려해야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하다는 철학을 담고 있다.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활용된다. -2018년 새만금도민회의 출범부터 현재까지 함께하셨습니다. 새만금도민회의 출범 배경을 말씀해주신다면.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며 고향인 군산에 내려와 보니 지역의 가장 큰 문제가 새만금이었습니다. 새만금은 사업을 처음 기획한 노태우 정권을 빼도 6개 정권이 관여한 대규모 국책사업입니다. 하지만 30년이 지나며 새만금은 전북도민에게 희망이 아닌 애물단지가 돼 있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고향을 위해 내 역할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 새만금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들었습니다. 도민들은 새만금 개발을 기다리며 지쳐 있었고, 서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럼 나라도 목소리를 내자고 생각했습니다. 의견을 모아보니 동의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렇게 단체나 활동가 중심이 아닌, 이해당사자인 도민 중심으로 새만금도민회의란 조직을 꾸리게 됐습니다. -그동안 성과도 있었죠. 새만금도민회의의 목표는 세 가지였습니다. 새만금 해수유통 실현과 민관 거버넌스 조직, 마스터플랜 변경입니다. 해수유통은 새만금의 친환경적 개발, 전북 수산업의 회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당시 해수유통에 대해 말하면 일부에선 새만금 개발을 하지 말자는 얘기냐고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많은 인식 변화가 생겼습니다. 새만금을 신재생에너지 메카로 만드는 새만금 마스터플랜 변경 등도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됐듯 새만금 해수유통과 관련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올해 새만금위원회는 새만금 해수유통 결론을 3년 뒤로 미뤘습니다. 이 결정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새만금을 담수화해 인근 농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한다는 당초 계획을 수정함으로써, 사실상 담수화를 포기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새만금은 수질문제가 심각합니다. 새만금호 수질 개선을 위해 4조 원 넘게 투입했으나, 수질은 최하위인 5~6등급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새만금호는 시화호보다 7배 큰 규모로 썩기 시작하면 정화하기가 훨씬 힘듭니다. 도시용수는 최소 3급수, 농업용수는 최소 4급수가 돼야 합니다. 지금은 농업용수로도 못 쓰는 물인 셈입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3년간 해수유통 확대 방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야 합니다. 지하터널식 해수유통, 조력발전을 통한 해수유통 등 다양한 대안이 있습니다. -새만금은 해수유통, 행정구역 문제 등 갈등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새만금 문제는 소통,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입니다. 새만금 갈등 해결을 위해 풀어야 할 과제,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조심스럽지만, 단체장이던 국회의원이던 정치인은 유권자를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합리적대승적 양보나 타협을 위해선 민관 거버넌스 구축이 필요합니다. 이해당사자인 주민이 참여해야 합니다. 일각에선 시민이 참여하면 (사업) 진행이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세상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앞에 선 사람이 높은 민도에 의해 밀려가는 형국입니다. 새만금 행정구역 문제도 군산김제부안지역 주민이 참여해 논의해야 합니다. 일례로 화성안산시흥지역은 시화호 민관 거버넌스인 시화지구지속가능발전협의회를 만들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협의회의 전제조건은 열린 협의로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만장일치제로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 인사를 반드시 참여시킵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주민들의 현장성을 토대로 갈등을 해결하고,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최근 산업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는 ESG 경영입니다. 새만금 또한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새만금과 ESG 경영, 어떻게 보십니까. 새만금이 ESG의 모델이 되길 바랍니다. ESG 경영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은 환경(Environment) 부문입니다. 이와 관련 RE100 운동은 2050년까지 기업에 필요한 전력 100%를 신재생에너지로만 충당하겠다는 국제 캠페인으로 SK, LG 등 국내 대기업들도 속속 참여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새만금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신재생에너지 발전 단지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청년 녹색 일자리를 창출해야 합니다. 또 갈등구조를 해결해 새로운 사회 공동체를, 민관 거버넌스를 도입해 기업의 새로운 지배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공간이 새만금입니다. 새만금에서 ESG 운동의 모범 모델이 나왔으면 합니다. 새만금이 변하면 대한민국이 바뀝니다. -끝으로 도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전북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입니다. 그동안 도민들은 잘 참고 견뎌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인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년 3월엔 대통령선거, 6월엔 지방선거가 있습니다. 도민들이 ESG 관점에서 후보를 검증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전북은 우리 자손이 대대손손 살 보물 같은 땅입니다. 도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전북의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습니다. △ 조준호는 1958년 전북 군산 출생. 노동운동가, 정치인 출신 시민사회운동가. 군산초, 군산북중, 군산제일고를 졸업했다. 화성 기아자동차에서 일했다. 전국구속수배해고노동자투쟁위원회(전해투) 위원장, 전국자동차산업노동조합연맹 위원장, 전국금속산업연맹 수석부위원장, 민주노총 위원장 등을 지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소속으로 화성시 갑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12년 통합진보당의 공동대표로 선임됐다. 같은 해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 등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탈당했다. 노회찬과 함께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를 맡았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의당 소속으로 군산시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2018년 새만금도민회의를 출범하고 현재까지 대표를 맡고 있다. 선친은 조용술(1920~2004) 목사이다. 조용술 목사는 문익환 목사와 함께 한국 교단을 대표하는 원로목사로 민주통일운동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의 형은 평화통일운동가인 조성범(1956~2021) 겨레살림공동체 운영위원장이다. /육경근 문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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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21.07.25 16:58

[전북명산, 회문산의 속살] ④순창의병, 전국 확산에 기폭제 역할

나라가 기울던 조선말에도 회문산은 격랑의 한복판에 있었다.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전봉준김개남손화중김덕명 장군이 회문산권 지역을 기반으로 혁명을 꿈꿨고, 전봉준김개남 장군이 혁명의 좌절을 맛보며 체포된 곳 역시 회문산 기슭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일제의 침탈에 맞섰던 의병항쟁은 회문산권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항일의병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최익현 선생의 순창의병은 의병항쟁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격동기 역사에서 첩첩산중의 회문산이 거악에 맞섰던 민중의 보금자리였던 셈이다. 회문산권 의병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면암 최익현(1833~1906)이 누구인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됐을 때 조약의 무효화와 박제순이완용 등 을사 5적의 처단을 주장한 청토오적소(晴討五賊疏)를 올리며 위정척사와 항일의 선봉에 섰던 유학의 거봉이지 않던가. 그가 지역 연고가 없는 회문산권에서 의병활동을 하게 된 것은 정읍 태인(현재 산내면 종성리)에서 기거하던 군산 출신의 돈헌 임병찬(1851~1914)이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충남 청양에 머물던 면암은 충청지역에서 이미 민종식 등이 거병한 상태에 있어 영호남과 서로 호응해야 한다는 큰 그림 속에서 태인을 택했다. 면암은 1906년 3월 태인에서 임병찬을 만나 두 달 남짓 준비를 거쳐 그 해 6월 태인 무성서원에서 창의 구국을 결의한 뒤 의병부대를 편성해 순창으로 향했다. 순창에 입성할 당시 의병 수는 500명 정도였고, 곡성에서 무기와 병력을 증강시켜 순창으로 회군했을 때 의병은 900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정부에서 지방군대인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를 출동시켜 공격하자, 면암은왜라면 마땅히 한 번 결사하여 보겠지만, 왜가 아니고 진위대 군사라면 우리가 위를 치는 것이니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느냐며 접전 중지를 명령하고 진위대에도 포위망을 풀 것을 종용했다. 의병진이 붕괴된 후 면암과 함께 끝까지 남았던 13인이 현장에서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회문산권 의병은 짧은 기간에 규모도 크지 않았으나 면암의 상징성 때문에 전국 의병항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일제는 최익현과 임병찬을 서울로 압송해 굴복시키려고 회유와 강박을 가했으나 굴하지 않자 이들을 일본 대마도로 데려갔으며, 최익현은 그 해 12월 순절했다. 이듬해 1월 시신으로 환국했을 때 민중들이 만기를 붙들고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면암과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의병 13인은 순창 13 의사로 기려지고 있다. 최익현의 거병에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 돈헌 임병찬이다. 낙안군수를 역임한 돈헌은 나라가 기울어지자 관직 제수를 거절하고 회문산 북쪽 기슭 정읍 산내면 종성리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돈헌은 학당을 지어 놓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단순히 학문만 익히게 한 것이 아니라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를 익히게 해 후일을 대비했다. 면암의 명성에 가려 있지만 면암 의병의 실질적 토대를 제공한 분이 바로 돈헌이었던 셈이다. 면암과 함께 체포돼 대마도로 유배됐던 임병찬은 이듬해 귀국해 회문산에 은거하면서 다시 후일을 도모했다. 그는 1912년 고종황제가 내린 밀명에 따라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전국 조직으로 확대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면서 체포돼 거문도에서 옥고를 치르다 1916년 순국했다. 지금도 회문산 중턱에 토성과 훈련장의 흔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유적비와 조감도만이 당시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그의 무덤은 현재 순창 회문산 정상 부근 기슭에 있다. 춘계 양춘영(1875~1910, 자 윤숙)은 면암 의병진이 무너진 후 바통을 이어받아 회문산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벌였던 순창 출신의 대표적 의병이었다. 무성서원 거병부터 가담했던 춘계는 면암돈헌의 의병진이 무너진 후 1908년 의병대장으로 추대됐으며, 호남 각지와 향교에 통문과 의격문을 띠워 700여명의 의병을 선발했다. 그는 회문산 중봉 아래 돼지툼벙이라는 곳에 훈련장을 마련하고 1909년 12월 피노리 수비대에 잡힐 때까지 1년5개월간 유격전을 벌였다. 총 270정과 칼 300자루를 무장했다는 내용, 부하 최산흥으로 하여금 의병 40명을 이끌고 남원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했다는 등의 항쟁 사실이 재판기록으로 남아 있다.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는 한국이 일본 제국의 보호를 받음은 한국의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일로 보고, 이에 불만을 품고 일본 수비대를 격퇴함과 함께 일본 관헌, 그밖에 일본인을 한국국외로 추방하고 또 한국정부를 개조하여 한국 정치를 변경할 것을 계획했다며 교수형을 선고했다. 1910년 전주감옥에서 처형된 춘계의 무덤은 인계면 도룡리에 있다. 순창군이 2000년대 중반 춘계 생가(구림면 국화촌)를 중심으로 의병공원을 추진하다 중단했으며, 춘계가 항일투쟁을 도모했던 회문산 기슭 의병훈련장도 현재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을 준다. 순창의병에서 양춘영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의병장이 신보현(1868년~?)이다. 순창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에서 활약했던 그의 가계나 성장 등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복흥면 출신들이 그의 휘하에서 대거 활약한 것으로 나와있어 복흥을 기반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보현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의병 중 교수형 선고를 받거나 중형을 받아 옥고를 치른 의병이 줄잡아 10여명이다. 1907년부터 많게는 300여명의 의병을 이끌었던 신보현은 1909년 12월 정읍 석계촌에서 체포되면서 그에 대한 활동기록은 여기서 멈췄다. 면암돈헌 순창의병에서 양춘영과 신보현으로 이어지는 순창의 이런 의병활동은 전북에서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으로 꼽힌다. 면암의 순창의병에 가담해 체포된 후 형을 받은 순창 출신 의병이 80명에 이르며, 그 중 교수형을 받은 의병만 7명이다. 양춘영, 신보현 휘하에서 활동했던 많은 의병들의 고초도 재판기록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순창 의병 활동을 종합적으로 아울러 체계화시킨 연구가 미약하고 역사자원으로 활용하려는 노력 또한 미흡하다. 경술국치 후 독립의지를 다지며 쌍치면에 설립된 정자인 영광정(迎狂亭)이 전북도문화재자료로 지정 보존되는 정도다. 한 때 추진하다 중단했던 의병공원 조성 등에 관심이 요구된다. 회문산은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을 지켜본 곳이다. 동학농민혁명 총대장이었던 전봉준 장군이 관군에 체포된 곳이 회문산 아래 쌍치면 피노리다. 농민군의 또 다른 거두였던 김개남 장군 역시 피노리에서 20여리 떨어진 회문산 기슭 정읍 산내면 종성리에서 전봉준과 같은 날 체포됐다. 전봉준이 피노리로 간 것은 태인전투에서 패한 후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종성리에 숨어있던 김개남과 만나 재기의 기회를 노리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옛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전봉준이 관군에 잡힌 뒤 일본군에 넘겨져 서울로 압송돼 재판을 거쳐 효수형을 당했다. 서울 광화문에 세워진 전봉준 동상이 당시 압송과정에서 찍힌 사진이다. 전봉준 피체지인 피노마을에 녹두장군 전봉준관이 설립됐으며, 피노마을에서 구림면 금상마을까지 압송경로를 따라 둘레길이 조성됐다. 김개남 장군은 매부 집에 숨어 있다가 관군 80명의 급습으로 체포됐고, 재판도 받지 않은 채 전주 풍남문 밖 초록바위 부근서 처형됐다. 김개남의 소재를 밀고한 이가 바로 인근에 기거하던 임병찬으로 알려졌다. 척왜를 부르짖었던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훗날 의병대장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던 돈헌에게 고발됐다는 게 아픈 역사의 뒷면이 아닐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는 특별법 제정을 통해 명예회복과 국가기념일 지정이 이뤄졌고, 의병활동과 마찬가지로 참가자들에 대한 독립운동 서훈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김원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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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2 17:50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01)한여름 유둣날의 물맞이

덥다. 이렇게 더운 여름날 선조들은 삼복더위를 지나는 날 중, 음력 유월 보름을 물의 날로 삼아 유두절(流頭節)의 풍속을 즐겼다. 유둣날이 되면 물맞이하러 가자!며 시원한 물줄기로 더위를 식히고 물로 액운을 씻으며 몸과 마음을 추스렸다. 유두는 머리를 감거나 빗는다는 소두(梳頭), 폭포에서 물을 머리에 맞는 의미인 타두(打頭), 물머리 수두(水頭), 머리의 옛말인 마리를 물과 합하여 물마리, 물맞이라고도 불렀다. 유두는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 감고 목욕을 한다는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에서 유래하여 청(靑)을 상징하고 양기가 왕성한 방향인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최고의 유두수로 쳤지만, 지역마다 색다른 유둣날 물맞이 장소가 있었다. 유두는 신라의 이두(吏讀)식 표기라는 말이 전해지며 천 오백여 년을 이어온 우리 고유 명절로 알려져 있다. 음력 유월 보름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길한 것을 씻고, 계음(?飮, 목욕재계하고 삿된 기운을 씻으며 즐기는 잔치)하는 것을 유두연(流頭宴)이라 한다는 내용이 고려 문인 김극기의 문집인 『김거사집』에 남아있으며, 유두날 술을 마시는 유두음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에 있는 등 고려와 조선 시대의 다양한 문헌과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그 중, 정약용의 둘째 아들인 정학유의 <농가월령가> 음력 6월령에는 삼복은 속절(俗節)이요 유두는 가일(佳日, 좋은 날)이라 / 원두밭에 참외 따고 밀 갈아 국수하여 / 사당에 올린 다음 모두 모여 즐겨 보세라는 대목과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 육자 한자 들고 보니 / 유월이라 유둣날 탁주 놀이가 좋을씨고라는 각설이 타령의 한 구절에도 유둣날의 풍습이 묻어난다. 유둣날에는 여름철 과일과 유두음식을 사당에 올리며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는 유두제사를 지내고 물가를 찾아 더위를 식히며 하루를 즐겼다. 『동국세시기』에 밀가루를 구슬 모양으로 만들어 유두면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듯이 대표적인 유두음식인 유두면과 국물에 경단을 넣어서 만든 수단(水團)을 먹으면 액운을 막아주고 유둣날 국수를 먹으면 더위를 먹지 않고 장수한다고 믿었다. 또한, 농사를 중시 한 선조들은 유둣날에 논과 밭에서 농신제를 지냈다. 삼복더위를 거칠 때마다 벼가 빨리 자란다는 옛말이 있듯이, 장마가 지나고 더워지면서 여름 햇볕 아래에 각종 작물이 잘 자란다. 이때는 보리나 밀 그리고 참외를 비롯한 밭작물을 수확하는 때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수확을 하고 마지막 모내기와 김매기도 하며 농작물 관리에 더욱 힘써야 하는 음력 유월 보름 즈음은 농부들이 바쁜 농번기이다. 게다가, 병과 해충이 생기고 수확을 앞둔 농작물에 새나 짐승들이 꼬이기 쉬우니 병충해 관리를 잘하고 밭의 농작물에 짐승들의 피해를 잘 막아야 한다. 또한, 논에 물을 잘 대어 논물관리에 힘을 써야 할 때다. 하여, 병충해가 없고 논물이 마르지 않으며 논둑이 터지지 않고 풍년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논고사, 논고시, 밭꼬시, 논꼬, 논멕이기, 유두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 농신제를 지낸 것이다. 유둣날 논과 밭에서 부침개를 부쳐 냄새를 풍기면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은 벼와 밭의 농작물이 병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에 따라 유두음식을 준비하여 제사를 지냈다. 고사의 재물로는 팥시루떡을 찌고 간혹 팥죽을 쑤기도 했다지만, 우리 지역에서는 찰떡이나 밀떡과 송편 그리고 여의치 않으면 감자를 쪄 으깨어 떡 모양으로 만들어 논 물꼬와 논둑 밑에 놓았으며 떡을 꼬챙이에 꽂은 논꼬시를 함께 올리기도 했다. 유두제사와 농신제를 지낸 뒤 올린 음식을 나누어 먹고, 산이나 계곡을 찾아 시원한 물가에서 물맞이하며 유두놀이를 즐겼다. 또한, 선비들은 아예 탁족(濯足)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심신을 정화하며 풍류를 즐겼다 하니 피서의 원조가 유두인 셈이다. 지역마다 물맞이 명소가 있었는데 부안의 직소폭포와 완주의 위봉폭포 아래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 물을 맞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더위가 가신다. 또한, 유둣날 이름난 약수를 찾아가서 머리를 감고 여의치 않을 시 그 물이라도 적시면 부스럼을 앓지 않는다고 했는데, 순창에는 물맞이 명소로 약수가 나는 샘물이 있다. 지금도 맑은 물을 내어주고 있는 구림면의 물통골 약수와 샘의 물이 구불구불 용의 모양으로 흘러가는 곳이라 하여 이름이 붙은 인계면의 두룡정(頭龍井)이 유명했다. 두룡정은 단오 때부터 인산인해를 이루던 곳으로 약수가 효험이 크다고 소문난 유둣날 물맞이 명소였으나 이제는 그 흔적만 남아 아쉽기만 하다. 유둣날 목욕재계하고 제를 지내던 것은 지금까지도 몸가짐을 바로 잡기 위한 경건한 준비로 남아있지만, 유두절이라 불렸던 오늘날 유두는 명절의 흔적이 거의 사라졌다. 작년 장마로 힘든 시절을 지내고 무더운 여름을 지내다 보니, 물맞이하던 선조들의 풍속도 논꼬시를 몰래 빼먹던 개구쟁이들의 모습도, 어머니를 따라 샘가에서 머리에 물을 축이던 어린 시절의 오랜 기억들도 아련하다. 더위와 오랜 유행병에 지치다 보니 옛 풍속에 남겨진 의미와 흔적들이 더욱 소중하다. 돌아오는 유둣날에는 집에서 유두국수를 해 먹고 흔히 말하는 랜선여행으로 물맞이 명소를 다니며 그 시원함에 마음을 싣고 모두의 안녕을 기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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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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