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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성립 전야(前夜)의 고고학 증거

인류가 남긴 인위적인 구조물이나 도구들은 당시 문화와 사회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들이다. 그 가운데 무덤유적은 전통성과 지속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종족 집단의 출자나 성격을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곧 새로운 묘제가 갑자기 출현하는 것은 집단의 이동을 의미하거나 강력한 문화적 영향을 가정할 수 있지만, 대부분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만경강 유역의 익산과 전주완주지역에서 점토대토기와 흑도장경호, 세형동검과 동경, 그리고 철기가 부장된 토광묘가 집단을 이루고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토광묘는 청동기시대의 묘제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철기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새로이 축조된 묘제로 이해되고 있다. 이 묘제는 중국의 동북지방이나 한반도 서북지방에서 이주해온 집단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마한 성립의 주체세력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이다. 마한 성립의 주체인 토광묘 집단은 만경강 유역에 갑자기 안착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마중물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들의 흔적들이 속속 들어나고 있다. 이러한 선행적 집단에 의해 축조된 묘제는 토광묘를 기본 속성으로 하지만 내부에 목관을 안치하고 이를 돌로서 둘러싼 소위 적석목관묘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부장된 유물에서 보면 점토대토기나 세형동검을 비롯해서 토광묘의 출토유물과 성격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출자가 동일한 집단임을 알 수 있다. 적석목관묘는 한반도 서해안 일대의 경기 충청 전라지역에서 산발적으로 발견되고 있는데, 만경강유역의 토광묘처럼 군집을 이루지 않고 대부분 1기?2기 정도 분포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이 분묘에서는 세형동검이 다수 부장되고, 특히 기원전 4세기경에 해당하는 나팔형동기, 방패형동기, 검파형동기와 더불어 팔주령, 동경, 간두령 등 의기와 관련된 유물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곧 적석목관묘의 피장자는 종교적 제의를 주관하는 오늘날 사제와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적석목관묘의 분포 의미는 만경강유역에 토광묘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선행적으로 들어온 집단으로서 청동기를 비롯한 문물을 분배해 주고, 제의를 주관함으로서 세력화와 집단화를 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통성이 강한 지석묘와 송국리 묘제 영역에서는 강한 배타성이 작용했을 것으로 세력화를 꾀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적석목관묘를 축조한 피장자는 풍부한 제의적인 청동기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장으로서의 자리매김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만 기층 송국리문화나 지석묘 사회와는 차별되는 제의 주관자로서 이후 토광묘 축조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올 수 있는 정보나 기회를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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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9 19:44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42) 초속(超俗)의 달관, 참선비 근정(槿丁) 조두현 시인

근정(槿丁) 조두현 선생(1925.7.30.~1989.12.28.)은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211번지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4년 전북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52년 삼례중 고교 교사, 1954년 익산 남성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77년 전주대학교 교수, 1978년 원광대학교 사범대학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선생의 제3 시집 『책장을 넘기다가』의 발문을 쓴 이상비 교수의 글에는 근정(槿丁) 집안의 자녀교육에 관련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선생의 증조부가 황소로 밭을 갈고 있는데, 한 장사꾼이 책을 짊어지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증조부가 그를 불러 무슨 책이냐고 물으니 칠서(七書), 즉 사서삼경(四書三經)이라 대답하니 즉석에서 자신의 황소와 책을 바꿔왔다는 이야기다. 황소 한 마리면 당시로는 매우 큰돈이었기에 이를 본 이웃들이 모두 놀랐다는 것이다. 이렇듯 황금보다 학문을 중시했던 집안의 전통은 자연스럽게 자손들에게 이어졌다. 근정(槿丁)의 구남매(九男妹)가 모두 각 분야에서 훌륭하게 된 것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집안 내력 아닌가. 선생은 1958년 『현대문학』에 「애가」 외 세 편의 시와 「한시신역」으로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으며, 1967년 『어느 門 밖에서』를 비롯하여 『증언』, 『책장을 넘기다가』 등 세 권의 시집을 펴냈다. 또한, 근정(槿丁) 선생은 한문학에 조예가 깊어 1971년부터 일지사, 동아출판사, 금성출판사 등에서 중고등학생용 한문 교과서 저자로 활동했으며, 다수의 한문학 연구서와 대학교재 등을 출간하여 한문학과 한문 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선생은 고달픈 삶 가운데에서도 생명 의지를 지적으로 승화시킨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특히 그의 시 「청명절(淸明節)」은 자연과 인생에 대한 무심한 관조와 달관의 자세를 잘 드러낸 대표적인 작품이다. 어제 밤에 비가 부슬거리더니 새벽에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몸이 노곤하여 달력을 바라보니 모레가 청명(淸明)이 아닌가 창을 열어놓고 뜰을 걷다가 백목련이 봉곳이 방울져 지금 잎이 돋아나고 있는데 거울에 비친 내 머리털이 더욱 희어져 보이는 것은 이 봄의 탓이 아닌가 이 세월의 탓이 아닌가 -청명절(淸明節) 전문 홍석영 교수는 근정(槿丁) 선생을 평생 삶의 도반(道伴)이라고 생각하면서 함께했다. 특히, 남중동 황새골에서 대문을 마주하고 살 만큼 늘 가깝게 살았다. 두 분은 9.28 수복 이후 익산의 남성학교에서 만났는데, 당시 남성학교에는 장순하, 천이두, 이동주, 박항식, 최학규, 김영협 등 훗날 한국문학의 대들보가 된 분들이 재직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풍(南風) 동인회를 조직하여 문학과 인생을 논했고, 어쩌다 논쟁이 치열해지면 근정(槿丁) 선생은 그건 아녀, 아녀.하며 장자풍(莊子風)의 푸근한 인간미를 보였다고 한다. 천이두 교수은 근정(槿丁)의 첫 시집 『어느 門 앞에서』의 발문에서 선생은 재학 중에 연비동인회(燕飛同人會)를 결성하여 좌장이 되었는데, 당시 동기들은 만학(晩學)의 선생에게서 형장(兄丈)다움을 느꼈다고 했다. 항상 따뜻이 보듬고 아우르는 온후한 선생에게는 어느 구석에도 문사연(文士然)하는 모서리가 없었다고 했다. 당시 함께한 국문과 1회 동기들이 박병순, 이기반, 조두현, 진을주, 최승범, 최진성, 김영협 등 모두 거목이었으니 얼마나 든든했을까. 이보영 교수는 그의 제3시집 『책장을 넘기다가』의 발문에서 근정(槿丁)의 시는 아름다운 자연과 사물의 완상과 찬미, 조촐한 선비다운 자적(自適), 초속적(超俗的)인 달관과 범용(凡庸)의 진덕(眞德)에 대한 긍정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내가 한 그루 나무로 서 있을 때 그 나무에서 돋는 이파리는 어떤 빛깔일까 내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때 그 꽃에서 풍기는 향기는 어떤 냄새일까. 내가 한 마리 새로 울음을 울 때 그 새의 부리에서 울리는 소리는 무슨 가락일까. 내가 한 개의 열매로 맺을 때 그 열매의 속에서 타고 있는 불은 무슨 이야기일까 -「열매」시 전문 - 이 시는 2000년 솜리예술회관 뒤뜰에 세워진 선생의 시비에 새겨진 시다. 이 시에는 늘 성찰하면서 청아한 삶은 누리고자 했던 선생의 학수천년(鶴壽千年)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송남 이병기 시인은 근정(槿丁)선생 송수(頌壽) 시문집에서 「걸어 다니는 무궁화」라는 시에서 선생의 삶을 기린 바 있다. 겉으로 하얀 꽃 이파리 / 깊은 마음일수록 속으로 타는 불덩어리 / 이웃을 깨우치고 / 들뜬 선잠을 사랑으로 재우던 자장가를 불러주셨던 분이 선생이라고 했다. 근정(槿丁)의 제자 송하춘 교수는 「우리 조두현 선생님」이라는 글에서 스승을 높이 우러렀으며 김병기 교수도 생아지부(生我之父)에 견줄 만큼 큰 스승의 사랑을 회고하였다. 이렇게 높은 학덕과 훌륭한 인품을 보여준 선생의 참 선비상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그의 고향 비봉공원 무궁화 동산에 빗돌 하나 세워줄 것을 제안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참고 : 근정 조두현 선생 송수 시문집 『학수천년(鶴壽千年)』 외 /송일섭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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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9 19:01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우리가 알아야 할 색채 ⑥

또 천주교의 성직자가 입는 여러 가지 색상의 옷에도 관심을 기울여 보자. 12세기의 교황 이노센트 3세의 기준을 보면 흰색은 환희결백승리영광불사(不死)의 상징으로 혼례 때의 천사 및 청문 된 사제의 제식에 사용되었고, 빨간색은 불과 피, 신의 사랑을 상징하여 신이 사랑의 불꽃을 피우는 성령제 혹은 순교자의 제식이나 수난일과 성령 강림제에 쓰였으며, 초록색은 희망행복, 영원한 생명으로 성직자의 연륜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고 검은색은 애도를 상징하여 장례식과 성금요일에 쓰이도록 한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우리나라를 일컬어 자칭 백의민족이라고들 하지만 이는 우리를 미화시킨 것으로 염색하는 시간과 공력이 없어서이다. 옛 사극을 보라. 조정에서의 관복에는 흰색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계급과 신분을 나타내는 데 쓰였으니 평민들이 채색된 옷을 입을 수 있는 기회는 고작 혼례 때나 아이의 첫돌과 같이 특별한 날에만 허용되었다. 녹의홍상이라거나 때때옷 등이다. 왕이나 귀족들에게만 염색된 옷이 허용되었고 그나마 등급을 나누어 입게 했다. 조선 왕조를 보면 정 13품과 종 12품은 붉은색, 정 46품과 종 36품은 파란색, 79품은 초록색, 사법을 담당하는 관리들은 검은색 등으로 구분하였다. 서양 르네상스 시기의 많은 성화에 나타난 옷의 색상을 살펴보자. 성모마리아나 예수와 같이 중심인물에 채색된 색채에는 파란색이 많이 쓰이고 그 중심인물에게서 멀어질수록 파란색의 농담이 엷어짐을 볼 수 있다. 당시 파란 안료가 다른 색 안료보다 몇십 곱절 비쌌기 때문이다. 햇빛이 없는 곳에는 의사가 찾아간다. 햇빛이 없으면 색도 없어서이다. 색채를 잘 이용하면 병원을 비롯한 각 사업장에서도, 아이들의 성장과 학습 능력에도, 하물며 사랑도 얻는다. 나폴레옹이 어느 날 연회를 열었다. 황후 조세핀은 그 당시 황제의 총애를 얻고 있었던 후궁이 그날 어떤 색의 드레스를 입을 것인지 염탐하라 일렀다. 파란색의 드레스를 입을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연회장의 커튼 모두를 초록색으로 바꾸고 본인은 붉은색 계통의 드레스를 입어 다시 사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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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8 18:06

진안에서 정여립의 대동정신과 죽도 관광화 세미나 열려

죽도선생 정여립이 펼친 대동사상을 재조명하고 그가 조직한 대동계의 활동 본거지로 알려진 진안 죽도의 관광자원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진안군에서 주최하고 대동사상기념사업회(이사장 신정일)에서 주관한 정여립의 대동정신과 죽도 관광화 세미나가 지난 5일 진안문화의 집에서 열렸다. 문화재청과 전북일보, 전북시인협회, (사)전라정신연구원, (사)한국미래문화연구원이 후원한 이날 세미나에는 신정일 이사장, 전춘성 진안군수, 김광수 군의회 의장, 안호영 국회의원, 전북일보 윤석정 사장과 정하선 동래 정씨 화수회 회장 등 정씨 가문 후손 다수, 우덕희 진안문화원장 , 9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세미나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직전 정여립이 주창하면서 전국에 확산시킨 대동사상이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 사상이라는 사실을 규명하고 이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해 관광자원화하는 데 지역의 역량을 모아야 한다는 취지로 마련됐다. 축사에서 전춘성 군수는 오늘 이 세미나가 정여립을 재조명하는 새로운 발판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안호영 국회의원은 대동사상은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판치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이고 이를 널리 알리는 데 국회의원으로서 할 일이 있다면 앞장서겠다고 약속했다. 윤석정 전북일보 사장은 만민 평등과 주권재민을 주장한 선각자 정여립이 진안 죽도를 본거지로 삼은 사실을 학생 시절엔 몰랐었다며 세미나를 통해 죽도가 관광자원화 되면 우리 진안이 자랑스러운 고장으로 비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 주제발표 및 토론 이날 세미나에서 <정여립의 기축옥사와 진안 죽도, 어떻게 재조명할 것인가?(신정일 이사장)>, <정여립과 승병세력(조용헌 경기대 초빙교수)>, <진안 정여립의 죽도 관광자원화 개발 방향(최영기 전주대 관광학과 교수)> 등의 주제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주제발표에서 신정일 이사장은 정여립의 대동사상은 서구에서 공화사상을 주창한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혁명보다 60년(1649년)이 앞서고 프랑스 대혁명(1789년)보다 200년이 앞선다.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등 역사자료에서 정여립 등 1000명의 조선 천재들이 죽임을 당한 기축옥사(1589년)와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진안 죽도인데 정여립의 사망지이자 천혜의 자원인 이곳을 관광자원화하면 훌륭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용헌 교수는 당시 천민이던 승려들은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는 대동계와 접촉하면서 기축옥사 3년 후에 일어날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하고 전쟁에 대비한 무장조직이었다며 승려들의 비밀결사 조직인 당취의 지도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는 대동계와 교류하면서 승병들을 훈련시킨 것 같다고 말했다. 최영기 교수는 정여립의 피난처였던 진안의 죽도를 진안 역사문화관광지로 활성화시키면서 연계 관광지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진안의 죽도를 정여립을 추모하는 역사문화 관광벨트로 재구성해 진안의 이미지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역사테마 탐방 콘텐츠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최규영 진안향토문화연구소장은 이른바 정여립 사건은 역모인가 혁명인가에 대해 아직 논란이 정리되지 않은 사안이다. 예를 들면 정여립의 사망지가 죽도가 아닌 부귀면 다복동이라는 역사 자료도 있다. 그런데 기축옥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기 전에 관광자원화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성급하다고 지적했다. 서수권 JTV 편성제작국장은 왜구의 소규모 침범이 아닌 대규모의 왜란을 대비하기 위해 대동계를 설립했다는 조용헌 교수의 주장은 조금 과장된 면이 있는 것 같다며 승병들이 대동계와 교류했다기보다 오히려 정여립과 인연 맺기를 주저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김원용 전북일보 선임기자는 기축옥사의 가해자였던 송강 정철과 관련된 것들은 전국 곳곳에서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심지어 선비들이 대거 숙청된 전라도에서조차 그렇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였던 정여립의 경우는 그를 기리는 사당 하나 없다며 정여립과 죽도의 관광자원화는 그저 신격화를 시키자는 게 아니고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재료가 될 것이라 말했다.

  • 문화일반
  • 국승호
  • 2021.03.07 16:10

전주 전통한지 사회교과서, 전북 3개 시·군에 보급

전주 전통한지로 제작된 초등학교 사회교과서가 전주, 임실뿐만 아니라 완주지역 학생들에게도 보급된다. 한국전통문화전당(이하 전당)은 전주 전통한지를 활용한 사회교과서를 전주, 임실에 이어 완주까지 확대 보급한다고 4일 밝혔다. 이와 관련 전당은 올해 전주 전통한지 사회교과서를 전주에 1만 5000부, 임실에 300부, 완주에 1000부 공급할 계획이다. 전주 한지장들이 손수 제작한 전통한지는 지도와 편지 형태로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에 각각 활용됐다. 전주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사회교과서 우리 고장 전주 편에는 가로 385㎜, 세로 270㎜ 크기의 전주 지도로 삽입됐다. 또 지난해부터 보급 중인 임실의 경우 초등학교 3학년 사회교과서 임실의 생활 편에 편지지(210270㎜) 형태로 전통한지가 삽입됐다. 올해 새롭게 보급될 완주 역시 임실과 마찬가지로 우리 고장 완주 편에 편지지(210270㎜) 형태로 실렸다. 지난 2016년부터 시행된 전주 전통한지 사회교과서 보급사업은 전주시와 전당이 전주 전통한지의 확산보급을 위해 추진해 왔다. 전당 김선태 원장은 앞으로도 전주 전통한지 사회교과서 보급사업을 타 지역으로 확대해 전주 전통한지의 우수성을 전국에 널리 알리겠다고 밝혔다.

  • 문화일반
  • 문민주
  • 2021.03.04 18:44

어진박물관 경기전 내 증축

전주한옥마을 경기전 안에 있는 어진박물관이 증축에 들어간다. 지난 2010년 건립된 어진박물관 지하 1층에 있던 어진 6본을 옮기기 위해서다. 당초 전문가들은 어진이 계속 지하에 있으면 습기가 차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4일 전주시에 따르면, 기존이 지어진 어진박물관 오른 편에 연면적 약100㎡ 규모로 지상 1층 한식 목구조 전시실이 증축된다. 사업기간은 올해부터 내년까지 예정돼 있다. 올해 3월부터 8월까지는 설계 용역, 공사는 내년부터 들어간다는 게 시의 설명이다. 총 사업비는 10억원으로 책정됐다. 시는 신축 어진박물관이 완공되면 기존에 지어진 박물관 지하 1층에 있던 세조영조정조철종고종순종 어진을 옮길 예정이다. 강숙희 전주역사박물관어진박물관장은 어진 6본을 지하 1층에 그대로 두면 습기가 차서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전문가들 사이에 있었다며 이런 어진을 제대로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기 위해 박물관을 증축하기로 했다 고 설명했다. 이어 기존 박물관 1층에 있던 태조 어진은 그대로 둘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전주역사박물관 운영방식도 다시 정립할 계획이다. 시가 박물관을 민간에서 위탁받아 운영하던 방식에서 직영으로 전환한 데 따른 것이다. 우선 시는 올해 3월부터 전주역사박물관어진박물관 관리 및 운영조례 제정에 돌입할 예정이다. 조례에는 유물의 수집과 관리, 사업계획, 운영에 필요한 사항 등을 규정한다. 강 관장은 4월 회기에 올릴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운영방향을 정립하기 위한 자문위원회도 구성할 계획이다. 위원회는 7명~8명 정도 구성할 예정이며, 미술역사고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섭외할 예정이다. 강 관장은 현재는 자문위원들을 누구를 섭외할 지 논의하는 단계라며 위원들이 결정되면 운영방향에 대패 심도깊은 고민을 나눌 계획이라고 밝혔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3.04 18:37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학예실장의 전통문화 바라보기] 동해안 별신굿과 기장 멸치

굿당 앞에 걸어둔 등. /사진=문화재청 누리집 요사이 필자는 요리에 푹 빠졌다. 특히 요리 프로에 넋을 잃었다. 참으로 세상엔 맛난 음식과 재료가 너무나 많다. 그동안 그러한 것을 몰랐던 것이 왜 이리 창피한지. 물론 창피한 일까지는 아니지만 바로 가까이 좋은 재료와 방법이 있는데도 그저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허망하게 채웠던 불행한 현실이 참으로 부끄럽고 나 자신이 유감스러웠다. 오늘은 TV에서 유난히 멸치국물에 대해 장황하다. 그래! 바로 그거였어! 알고는 있었지만 너의 조그마한 몸에 그리 고소하고 후덕한 감칠맛이 있었다니 정말 멸치야 너 반갑다! 멸치는 참으로 조그만 녀석이다. 그런데 정말 고소하고 맛있다. 아주 조그마한 놈부터 중간, 아주 커다란 놈까지 종류도 참 다양하다. 우리나라 멸치가 유명한 장소는 크게 두 군데로 말할 수 있다. 물론 남해와 서해 바다에서 고루 맛볼 수 있는 물고기지만 잡는 방법과 시기, 저장과 요리 방법에 따라 그 고장의 특징과 맛이 다르다. 그중 필자가 추천하는 첫 번째 장소는 부산 기장이다. 그 이유는 기장이 전국 멸치 유자망(流刺網) 어획의 6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많은 수확량이 있는 곳이며 멸치를 싱싱한 회로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기장 대변항을 가면 그 참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두 번째 참맛의 추천지는 남해 죽방 멸치다. 전통의 방식 그대로 대나무 방을 만들어 멸치를 몰아 잡는 방식으로 그곳은 참으로 천연의 맛이 있다. 하지만 그만큼 보통 멸치에 비해 값은 비싸다. 모두 각각 특징과 맛이 다른 이유가 있으니 참으로 멸치, 당신은 대견하기까지 하다. 멸치의 고장, 부산 기장은 동해안과 남해안의 꼭짓점이다. 그 이유는 지리적으로 동해와 남해의 모서리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의 기장은 경남이 아닌 해양 도시 부산시로 소속되어 있다. 다양한 바다의 먹을거리가 많은 곳이기도 하지만 향토 신앙이 맥을 잇고 그 전통을 잇고자 했던 기원(祈願)의 장소이기도 했다. 저마다 근대화, 현대화로 어려워진 전통의 맥을 계승하기까지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을까? 멸치의 본산 기장에는 두 종류의 굿이 전승되고 있다. 하나는 부산 동래에서 강원도 고성군에 이르는 국가무형문화재 제82-1호 동해안 별신굿이 그것이요 또 하나는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23호 기장 오구굿이다. 어느 음식이든 합이 되어 고소함의 극치를 보여주며 우리 식탁의 풍요로운 맛을 책임지는 멸치. 그리고 우리네 마음과 몸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주었던 동해안 별신굿. 이 모두는 오랜 시간 동안 나의 가족과 더불어 우리 공동체의 안녕, 행복을 위해 기원하며 음복했던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유산이자 보물이었다. 지나온 우리 민족의 4350여 년, 이제 앞으로 펼쳐질 일만 년을 위해 값진 우리의 문화 유산과 신토불이(身土不二) 향토 음식 자원을 잘 보존하여 굳건하고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야겠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3.04 18:37

벼랑 끝에 선 전북 예체능 위기

전북 예체능이 벼랑끝에 서있다. 도내 대학에서는 재정문제와 신입생 부족으로 전통순수 예술계통 학과들이 폐과절차를 밟거나 축소되고 있고, 체육인재를 양성하는 고등학교 역시 신입생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2일 전북 예술계에 따르면, 원광대는 지난 2014년 계속된 정원 미달사태를 이유로 서예학과를 완전히 폐과했다. 앞서 지난 2012년에는 서양화, 한국화, 도예, 조소 등으로 세분화된 전공이 미술과로 통폐합됐다. 취업률 저조와 신입생 부족이 이유다. 군산대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다. 군산대는 지난 2018년 도예과를 폐과했고, 앞서 2014년 세라믹콘텐츠디자인학과를 신입생 입학 2달 만에 폐과 결정을 내렸다. 입학 정원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석대와 전주대는 일찍부터 순수예술계통 학과가 폐과됐다. 우석대 한국화과는 2000년대 전반기, 전주대 미술학과(한국서양화, 조소 전공)는 2013년에 사라졌다. 강신동 전 한국미술협회 전라북도지회장은 교육부가 지난 2003년 7차 교육과정을 시행하면서 초중고에 예체능 교육과정을 축소한 데 따른 영향이 크다며 그 때부터 순수예술학과에 입학하는 학생수가 대폭 줄었다고 설명했다. 국악관련 학과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지난 2015년에는 우석대학교 국악과가, 지난해에는 원광대 음악학과(국악전공 포함)과 폐과됐다. 유일하게 남은 전북대학교 한국음악학과 입학생 정원도 줄고 있다. 1990년대에는 30여 명 정도 뽑다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20여 명대로 줄었다. 특히 지난 5년 동안 27명을 유지하다가 올해 다시 26명으로 감소했다. 도립국악원 김용호 교육학예실장은 전통문화 부흥기였던 1990년대까지 국악 관련 학과에 지원자가 많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점점 줄어들고 있다며취업난 심화와 학령인구 감소 등 여러 가지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전문체육인을 양성하기 위한 중고등학교의 현실도 암울하다. 전북체고는 올해 신입생을 모집한 결과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전북체고의 2021학년도 신입생 입학 지원 및 합격자 현황에 따르면, 모집정원 90명 가운데 지원자는 65명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합격자수는 64명으로, 정원에서 26명이 부족한 수다. 전북체고는 지난 5년 간 신입생 정원을 채우지 못했고 수도 현저히 줄었다. 2020년도에는 정원 90명 가운데 75명, 2019년 79명, 2018년도 83명, 2017년도 83명이다. 1973년 전주시 송천동에 설립된 전북체중은 개교 5년 만인 1978년 학생수 감소로 폐교됐다가 2007년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전북체고 내에 다시 설립됐다. 39년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 전북체고 박재중 교장은 학령인구가 줄어든데다 비인기 종목에 대한 인기가 식은 탓도 크다며특히 우리 학교에선 일반고보다 비인기 종목을 많이 양성하다보니 신입생 부족 문제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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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희
  • 2021.03.02 18:21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역사문화권정비법'에 「전북의 마한」 당연히 포함돼야

금년 6월 10일부터 시행 예정으로, 2020년 6월 9일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 (약칭: 역사문화권정비법)이 제정되었다. 제1장 총칙에 보면, 이 법은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문화권과 그 문화권별 문화유산을 연구조사하고 발굴복원하여 그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알리고 지역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법 제2조(정의)에서는 마한역사문화권을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남 일대 마한 시대의 유적유물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으로 한정하고 있을 뿐, 전북지역의 마한 성립과 발전에 관련된 유적들을 제외하고 있어 많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먼저 우려되는 점은 영산강유역 중심의 전남지역의 마한 연구만으로는 제대로 된 마한사를 복원할 수 없는 절름발이 연구에 머무르게 될 것이란 점이다. 또한 자칫 소지역주의에 치중된 나머지 편향되고 왜곡된 연구 경향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문화권정비법의 마한역사문화권역에서 전북지역 마한의 역사와 문화가 제외된 것은 전북의 정치권이나 행정, 그리고 학계마저도 한걸음 뒤처져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단 반성부터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전북지역이 마한의 성립지로서 가지는 위상에 걸맞지 않게 마한 연구에서 주체가 되지 못하고 피동자의 입장이 된 듯하다. 또한 전북지역이 마한역사문화권에서 제외된 것은 경제개발시대에 전북이 소외되어 왔던 맥락에서 드는 우려는 단순한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다. 전북지역은 한강 이남에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최초로 성립된 정치체인 마한의 본향으로서 진변한을 아우르는 삼한의 맹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과정들을 증명하는 실체적 고고학 자료들이 전북지역에서 속속 밝혀지고 있다. 특히 <삼국사기> 「열전」 견훤조에 우리나라는 삼국의 시초로 마한이 먼저 일어난 뒤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그런 까닭으로 진한 변한은 우리나라를 뒤따라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백제는 금마산(익산)에서 개국하여 600여년이나 내려왔는데(..중략..)완산에 도읍을 세우고 의자왕의 숙원을 풀어 주고자 함이다이라 하여 마한과 백제를 일체화 시킨 마한역사문화의 계승의식을 읽을 수 있다. 곧 익산 일원에 역사적으로 면면히 흐르는 전통적 마한 의식을 바탕으로 전북의 마한역사문화권역은 당연히 역사문화권정비법에 포함되어야 하는 당위성이 강조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보면, 문헌자료의 절대 부족으로 6700여년간의 마한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데 많은 장애가 있어 우리 고대사의 중요한 시기인 삼국 정립기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지역에 치우친 마한역사문화권역 설정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 또한 한국 고대사회의 역사문화연구가 정치적 선입견이나 힘의 논리에 좌우되는 점에 경계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최근 전라북도는 <역사문화권특별법> 관련 세미나를 거쳐 정리된 전북지역의 마한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문화재청과의 협의를 통하여 마한역사문화권에 전북지역을 포함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역사문화권정비법 제정을 지켜보면서 한 연구자로서의 바램은 숟가락 하나 덤으로 올려놓아 몫을 찾는 것보다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전북지역의 마한을 밝혀내는 노력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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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2 18:21

전주문화재단, 코로나19 이후 ‘문화플랫폼’ 역할 강화

전주문화재단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변화된 예술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지역문화 플랫폼으로서 역할을 강화한다. 특히 기업과 시민의 문화예술 후원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직접 발 벗고 나서 귀추가 주목된다. 재단은 2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2021년 신규 비전과 주요 정책을 발표했다. 이와 관련 재단은 올해 기업과 시민의 적극적인 문화예술 후원을 끌어내겠다고 밝혔다. 모금이라는 좁은 의미의 후원보다 기업과 시민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소액 크라우드펀딩 등 다양한 채널을 개발해 제공한다는 것. 후원자 발굴유치, 예우 등 매개 활동을 통해 재단이 전주형 문화예술 후원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목표다. 이외에도 그린르네상스 프로젝트, 미디어북 콘텐츠 제작 등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를 고민한 사업들이 두드러졌다. 그린르네상스는 프로젝트는 코로나19로 인해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사회적국제적 이슈로 떠오른 상황에서 환경문제를 문화예술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이다. 재단은 환경문제를 문화예술적으로 재해석한 창작품 제작과 실연을 지원하고, 관련 포럼을 열어 담론을 형성해 나갈 계획이다. 또 배우 등 지역 예술인과 협업해 지역 문인의 문학 작품을 오디오북, 전자책 등으로 제작하는 미디어북 콘텐츠 지원도 추진한다. 전주를 연고로 활약한 원로작고 문화예술인의 작품세계를 조명하고 정리기록하는 전주 백인의 자화상은 10주년 기념 아카이브 전시, 연구세미나를 진행한다. 전주문화재단 백옥선 대표이사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일상화로 예술지원 패러다임의 전환과 새로운 예술생태계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재단은 예술을 통한 회복과 공진화를 위해 선제적인 정책을 제시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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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민주
  • 2021.03.02 18:13

대동사상기념사업회, 5일 ‘정여립 대동정신, 죽도 관광화’ 세미나

대동사상기념사업회(이사장 신정일)가 5일 오후 3시 진안문화의집에서 정여립 대동정신과 죽도 관광화를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한다. 이번 세미나에서 신 이사장이 죽도와 정여립의 대동사상, 조용헌 건국대 초빙교수가 서산과 사명당이 연루된 기축사화, 최영기 전주대 교수가 명승 죽도 어떻게 관광화할 것인가를 주제로 발표를 이어간다. 정여립은 조선 선조 때 천하는 공공한 물건인데 어찌 주인이 따로 정해져 있는가라며 평등사상을 주창한 인물이다. 그는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에서 대동계를 조직해 백성들과 함께 활을 쏘면서 몸을 단련하고,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학문을 가르쳤다. 그러나 정여립에 관한 자료가 턱없이 부족해 그를 역사 인물로 다양하게 조명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대동사상기념사업회 신정일 이사장은 작은 기록들에서 그의 비범함에 대한 글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매우 혁신적이고 선진적인 사상을 주장하고 몸소 실천한 선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 당쟁에 밀려 패자가 됐으며 온갖 불편한 얘기들을 포함해 반역자로 낙인찍혔고, 우리 지역까지 반역향이라는 오명을 남기게 됐다고 말했다. 죽도는 정여립이 생을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 이사장은 죽도를 관광화하는 것은 정여립의 대동정신을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그의 사상을 드높이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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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민주
  • 2021.03.02 18:13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우리가 알아야 할 색채 ⑤

색은 상징이다. 상징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적인 규약에 따라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 사물로 나타내는 일, 또는 그렇게 나타난 표지, 기호, 물건 따위를 말하는 것으로 태극이 한국, 십자가가 기독교를 뜻하는 것과 같다. 또는 어떤 관념이나 사상을 구체적 사물이나 심상(心像)을 통해 암시하는 일 등이다. 숫자는 수에 대한 상징이다. 이 세상의 모든 언어도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숫자 4를 죽을 사死에 대입하여 싫어하고 빨간색으로 이름 쓰기를 꺼려하는 것도 그것들이 주는 상징 때문이다. 상징은 연상, 닮음, 관례에 의해 다른 것을 포현하는 개체, 그림, 쓰인 말, 소리, 마크와 같은 것이다. 다 알진 못하나 대학교도 각각 호랑이, 독수리, 청룡, 봉황 등으로 상징되지 않는가. 앞서 말했듯이 색은 각 지역을 상징하기도 하고 방위를 상징하며 등급도 상징하지만 연상 작용에서 오는 상징도 만만치 않다. 색의 상징에는 인간의 마음을 흔드는 정서적 반응과 색을 국가적 사상 또는 그 규칙의 표지색으로 하려는 사회적 규범의 두 가지가 있다. 빨간색의 정서적 반응으로는 정열을 상징하거나 불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사회적 규범으로는 정지나 위험을 상징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Ziggurt)는 고대의 네모반듯한 계단 모양의 성탑으로, 하늘에 있는 신과 지상을 연결시키기 위한 것인데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은 바빌론의 지구라트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상만으로는 한문의 무巫와 같다. 이 지구라트를 채색할 때에도 최상층이 빨간색, 최하층이 검정색, 지붕은 황금색으로 했다. 황금의 지붕은 태양을, 빨간색의 상층부는 비옥한 토지를, 하층부의 검정색은 황천을 상징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파란색의 옷을 입고 하늘을 상징하며, 디오니소스는 붉은 옷을 입어 피와 생명을 불태우는 정열을 상징하고 비너스는 초록색의 옷을 둘러 희망을 상징하였다. 이집트에서도 빨간색은 불과 사랑을 상징하였고 초록색은 영혼의 재생과 희망을 상징하였고 파란색은 공기와 지혜를 표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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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1 17:10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학예실장의 전통문화 바라보기] 정읍井邑과 정읍풍류

전라북도 정읍시의 전통문화을 살펴보면 참으로 많은 전통예술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전문 전통예술인과 일반시민들도 잘 알고 있는 궁중정악의 백미 수제천<정읍> 그리고 정읍의 풍류인 정읍풍류는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전라북도의 전통예술이다. 국립국악원이 해외에 한국의 궁중음악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연주하며 많은 애정과 호응을 얻는 음악 중 하나가 바로 수제천이다. 수제천의 아명은 정읍井邑으로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우리가 배웠던 사모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부르던 노래 <정읍사>를 뜻한다. 백제 속악俗樂인 정읍사는 7세기 중엽 이전부터 고려에 전해졌고 조선조에 와서 처음으로 한글로 불리었다. 수제천은 14세기부터 임금이나 왕세자가 거동하는 의식용 음악으로 변하면서 자연스레 노래 부분은 사라지고 관악만으로 연주하는 곡으로 사용됐다. 궁중음악의 형식으로 다시금 다져진 수제천은 구성이나 음악의 모양새 또한 거대한 준령 같은 장중함과 위엄, 화려함을 갖추게 된다. 노래가 있던 정읍사의 가사 부분을 잠시 살펴보면 달아 높이 떠서 멀리 비추어 우리 남편이 돌아올 길을 밝혀 주소서 이러한 정읍은 우리 민족의 애틋한 사랑과 소원이 들어간 소중한 우리 선조의 마음이었다. 풍류는 바람 풍(風)자와 물 흐를 유(流)자가 합쳐져서 된 말로 풍치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일 또는 운치가 있는 일로 풀이하기도 하고 세속적인 가치에서 벗어나 서로 즐겁게 어울리며 살아가는 삶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 모두 행복한 삶을 위한 치유의 향유(享有)를 위한 방법의 하나였다. 정읍풍류의 전통은 허창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계문은 허창으로부터 풍류와 정가를 배워 제자들에게 전함으로써 정읍지역의 풍류와 정가의 전통을 수립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전계문의 제자로는 단소의 전추산, 거문고의 김용근, 대금의 신달룡, 정가의 정경태, 장고의 박홍규 등이 있었고 전계문의 제자 중 전추산은 단소의 최고 명인으로 우리나라 향제풍류의 실질적인 개척자 역할을 한 분이다. 전추산은 정읍지역 풍류계인 아양계와 초산율계의 음악적 지도자로서 이 지역 풍류의 전승과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읍지역 풍류객의 최초의 조직은 아양계(峨洋契)였다. 아양계는 후에 초산율계(楚山律契)로 발전하였고, 다시 정읍정악원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면서 정읍지방 풍류의 전통을 이끌어온 모체가 되었다. 또한 김문선을 중심으로 1999년 샘깊은소리회가 정읍풍류의 계승을 위해 설립되었는데 2004년 정읍 달맞이골(월영마을)에 전용공간인 샘소리터를 짓고 정읍의 풍류를 현재 널리 알리고 있다. 이렇듯 정읍(井邑)을 모체로 발생한 전통음악인 수제천와 정읍풍류는 선조의 사랑과 소원, 치유의 향유享有를 담고 있으며 소중히 전승해야 할 전라북도의 큰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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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25 17:26

[전라감사 100인 열전] 양녕대군 폐세자를 주청한 유정현

유정현은 고려말 전라도안찰사와 조선건국후 태조대 전주부윤을 역임하고, 태종 4년(1404) 전라감사에 임용된 전라도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조선건국후 공신이 아닌 순수 관리출신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며, 태종의 뜻을 받들어 양녕을 폐위시키고 충녕을 세자에 올렸다. 유정현(柳廷顯, 1355~1426)의 본관은 문화, 자는 여명(汝明). 호는 월정(月亭)이다. 첨의중찬을 지낸 유경(柳璥)의 4대손이며, 아버지는 문화군(文化君) 유구(柳丘)이다. 경기도 안양이 출신지라는 말이 있는데, 그의 묘소가 안양 동안구 비산동에 있다. 그는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음사(蔭仕)로 등용되어 전라도안렴사를 지내고, 양근군(楊根郡) 수령과 대간인 장령ㆍ집의, 국왕의 비서인 좌대언 등을 역임하였다. 공양왕 4년(1392)에 정몽주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조선 개국 후 풀려났다. 태조 2년 그의 두 아들이 감시(監試)에 합격하였다고 하여 직첩을 돌려받았다. 조선건국후 태조 3년 상주목사에 임용되었고, 이후 병조전서ㆍ완산부윤 등에 제수되었다. 그가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태종대 이후이다. 태종 4년 전라도관찰사에 임용되었고, 이후 경기도관찰사ㆍ충청도관찰사ㆍ판한성부사ㆍ형조판서ㆍ예조판서ㆍ대사헌ㆍ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어 태종 16년 5월 좌의정에 올랐으며 그해 11월에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세종 원년 대마도 정벌 때에는 삼군도통사로 활약하였다. 그는 세종 18년 6월 양녕을 폐세자하고 충녕을 세자로 올리고 난 후에 영의정에서 물러났다가 세종 즉위년에 다시 영의정에 임용되어 세종 6년까지 재임하였다. 태종말에서 세종초까지 8년여를 영의정으로 재임한 것이다. 세종 6년 영돈령부사에 임용되고, 세종 8년 3월 좌의정에 임용되었다가 그해 5월 사직하였으며 며칠 후 졸하였다. 유정현은 고려말 우왕 11년(1385) 가을과 겨울 추동번(秋冬番)으로 전라도안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조선건국후 태조대에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전라감사에는 태종 4년(1404) 3월 10일 임명을 받고 4월 5일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8월 27일경 이임하였다. 4개월 정도 짧은 기간 전라감사로 있었다. 태종은 유정현을 비롯해 각 도의 신임 관찰사들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인구의 많고 적은 것을 몰라서는 안 된다. 경들은 군현을 순행하면서 조사하여 후일의 물음에 대비하라.고 명하였다. 그가 부임한 직후인 태종 4년 4월 25일 의정부에서 전국의 전답과 호구수를 아뢰었는데, 전라도는 전답이 17만3990결, 호수가 1만5703호, 인구수가 3만9151명이었다. 이 수치는 당시 전국의 전답 78만2543결의 22%, 호수 15만3404호의 10%, 인구 32만2786명의 12%에 해당한다. 전라도의 토지는 전국의 1/4정도이고, 이에 반해 호수와 인구수는 1/10정도이다. 이 수치가 역을 당당하는 남자들만을 조사하는 등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전라도가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살기 좋았음을 보여준다. 태종은 국왕 중심체제 육조직계체제를 그의 재위 14년에 완성하고 이어 18년에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봉한 다음 양위하였다. 태종의 뜻을 받들어 이를 주도 했던 사람이 유정현이다. 태종 18년 6월 2일에 태종이 양녕을 폐세자 시킬 뜻을 비치자 당시 영의정 유정현과 좌의정 박은은 백관을 이끌고 양녕을 폐할 것을 주청하였다. 다음 날 양녕을 폐하고 누구를 세자로 삼을 것인가를 태종이 묻자 한상경 이하 군신들이 양녕의 아들을 세우자고 하였으나 태종의 의중을 읽은 유정현은 박은과 함께, 어진 사람을 택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태종비는,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화란(禍亂)의 근본이 된다고 반대하였다. 태종이 어진 사람을 골라 아뢰라고 명하자, 유정현은 아들을 알고 신하를 아는 것은 군부(君父)와 같은 이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효령은 자질이 미약하고, 중국사신을 접대하려면 술을 좀 해야 하는데 한 모금도 못하고, 충녕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병이 날까 염려될 정도로 밤새 책을 읽으며, 술은 잘못하지만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면서 충녕을 세자로 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정현 등이 신 등이 이른바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擇賢]도 또한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유정현은 태종대 2인자 하륜과 세종대 2인자 황희 중간에서 영의정으로 8년간 재임하면서 태종대에서 세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재상이다. 지금까지 태종에서 세종대 정치를 논할 때 하륜과 황희를 대표적으로 생각했지만 그 중간에 유정현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유정현은 태종이 총애한 태종의 사람인 것 같다. 태종은 정치적 혼돈을 수습하고, 세종을 세워 새 시대를 열어가는 구도를 짤 때 이 일을 맡아 수행할 적임자로 공신이 아니면서 역량을 갖춘 유정현을 택하였던 것 같다. 고려말 태종과 유정현은 관직생활을 같이하여 절친했다고 한다. 또 태종과 유정현은 친인척이 된다. 태조의 이복형 완풍대군 이원계의 딸이 변중량에게 시집갔다가 유정현에게 재가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8년 유정현의 졸기에, 사람됨은 엄의 과단(嚴毅果斷)하고 검약 근신(儉約謹愼)하여, 일을 조리 있게 처리하고 논의에 강정(剛正)하여 피하는 바가 없었다. 태종이 양녕을 폐하고 나라의 근본을 정하지 못하매,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의심스럽고 위태하게 여겼는데[疑危] 정현이 맨 먼저 어진 이를 택해야 된다는 의논을 내었다. 임금이 그의 소신을 중히 여겼으나, 정치를 함에 가혹하고 급하여 용서함이 적었고, 집에서는 재물에 인색하고 재화를 늘이어 비록 자녀라 할지라도 일찍이 마되[斗升]의 곡식이라도 주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호조를 맡고 있으면서 출납하는 것이 지나치게 인색하였다.라고 하였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이동희(예원예술대학교 교수, 전 전주역사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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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25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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