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전통문화거리 인사동은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대형 공사로 도로가 파헤쳐지면서 더욱 좁아지고 부산한 인사동 거리를 이즈음의 폭염속에 지나는 일이란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인사동 거리, 양옆으로 줄을 이어있는 화랑이나 골동품점, 예술상품점을 기웃거려보는 일은 여전히 즐겁다.
그곳 안국동네거리에서 인사동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화랑 ‘학고재’(學古齋)가 있다. 그 뜻이야 ‘옛것을 배우는 집’일텐데 그 뜻만으로도 인사동 거리에서 이처럼 제격인 이름도 없을 것 같다. 이름 덕일까. ‘학고재’는 인사동을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 뿐 아니라 문화계, 특히 미술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화랑이다. 고서화전문화랑으로 자리잡은 ‘학고재’가 그 수많은 화랑들중에서도 이름을 돋보인 연유가 분명히 있을 터. 집주인이 대체 누군가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학고재’의 집주인 우찬규씨(43). 고서화전문화랑으로 자리잡았다해서 60대 초로의 주인을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예상을 넘어서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을텐데 이 40대의 미술 전문가 사장은 부드럽고 정중하며 조용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어서 그나마 고서화와 무관한 사람으로 비쳐지지는 않는 점이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하다.
사실 학고재가 이름을 얻게 된 속내를 들여다보자면 오히려 고서화 전문화랑으로서 보다는 새로운 문화운동의 바람을 일으킨 화랑으로서의 몫이 크다. 학고재가 문을 연것이 1988년. 올해로 12년이 되었으니 그리 긴 연륜을 가진 화랑도 아니다. 그러니 그 명성의 농도에 의문이 갈만도 하지 않은가.
“88년 학고재가 문을 열때 이상하게도 인사동에는 고서화전문화랑이 많지 않았다. 한참 잘나가던 고서화랑들이 문을 닫고 새로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학고재는 오히려 그런 분위기를 거슬러 고서화전문을 표방하고 나섰다. ”특별한 욕심을 낸 것도 아닌데 화랑운영은 ‘순풍에 돗 단듯’했다. 열평 옹색한 공간을 벗어나기까지 2년, 지금의 학고재 건물을 살정도로 경제력을 갖추었으니 그 호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 이쯤되면 학고재의 운영전략이 남달랐을 것임을 짐작하는 일 또한 어렵지 않다.
학고재의 우찬규 사장은 남다른 문화인식으로 미술판을 열어놓은 사람이다.
그는 옛것이라면 옥석 구분없이 상품화하려 나섰던 기존의 고서화전문화랑들의 운영 틀을 벗고 기획전시를 통해 우리의 옛미술을 대중화하는 전략으로 나섰던 것이다. ‘19세기 문인들의 회화전’ ‘무낙관 회화전’ ‘구한말 그림전’ ‘조선중기 서예전’ 등 뒤를 이은 기획전은 고미술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한국미술계에도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고 그림 가격표시제로 고미술품의 유통질서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학고재의 대중화 명성은 90년대 초반, 당시만해도 적잖은 화랑들이 전시를 꺼리던 민중미술 작가들의 초대전으로 비롯되었다.
“고서화를 전문으로 하는 화랑이 민중미술작가전을 기획한다는 것이 전혀 별개의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나는 고서화전을 기획하면서도 회화사에 남을 미술품을 대상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회화사에 남을 작품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그것이 시대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역량있는 민중미술작가들의 작품에는 시대정신이 살아있었고 나는 그것을 주목했을 뿐이다.”
한국미술판도를 바꾸어놓은데 기여한 신학철 이종구 이철수 오윤 김정헌씨 등 민중미술작가들이 이곳 학고재를 거쳤던 바탕은 이렇게 설명되어진다.
미술전문가인 우찬규사장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학의 실력을 인정받는 재야 한학자다. ‘한학자’와 요즈음 가장 잘나가는 ‘아트그룹의 선두주자’로서의 관계가 매우 아이러니컬 하기도 하지만 ‘옛것의 힘과 가치’를 강조하는 그의 주장을 듣다보면 쉽게 이해되기 마련이다.
그는 정규교육과정으로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한학도. 고향인 부안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서당으로 교육의 장을 옮긴 탓이다. 그의 나이로 보아 아마도 우리나라의 마지막 서당세대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는 일찌감치 마음을 빼앗긴 한학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힘이 되고 있는지를 새록 새록 느끼고 있다고 했다.
“후회요? 없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중학진학을 포기해야 했지만 서당을 택한 것은 순전히 내 자의였거든요.” 당시에는 한글 전용의 주장이 워낙 강해서 한학에 매달리는 일로는 먹고살기가 막막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한학은 그에게 ‘이것이야말로 학문이다’는 어린아이 답지 않은 철학을 갖게 했다. 나이 열여덟살에 민족문화추진회에 응시해 합격했고 그 과정을 마친후 들어간 첫 직장이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같은 분야의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화제가 되었던 그의 실력은 그 후에도 곳곳에서 발휘되었는데 반반한 학교 간판이 없이도 교과서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을 정도로 그의 한학 실력은 빼어났던 것이다. 학자가 되고 싶었다던 그가 고서화를 거쳐 미술 전문가로 자리잡은 것도 이러한 경력과 무관하지 않은데 동양학연구소를 그만두고 나온 그는 스승인 신호열 안병주선생을 찾아다니면서 옛그림과 글씨에 눈을 뜨게 되고 그만 그 세계에 심취되어 버린 것이다.
‘학고재’의 이름을 더욱 빛낸 또하나의 통로는 도서출판 ‘학고재’. 지난 91년에 등록한 이후 지금까지 50종의 책을 펴낸 도서출판 학고재는 전통과 예술의 아름다운 만남을 활자매체로 보여주는 작업으로 출판문화의 대중화에 새로운 역할을 평가 받고 있다.
그는 지난 95년 국립민속박물관 건너편 아담한 한옥을 구해 도서출판 학고재를 옮기고 본채의 정취를 고스란히 살려 현대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화랑 ‘아트스페이스 서울’을 새롭게 열었다. 그 뿐 아니라 97년에는 ‘아트 컨설팅’을 설립했다. 아직은 문화에 대한 투자가 척박한 환경에서 그의 이러한 시도는 끝없는 도전이자 모험이지 않을 수 없겠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도전은 도무지 불안하지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말에 해답이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더라도 절대 변할 수 없고, 변해서는 안될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확실히 모른다. 학고재는 그것을 찾을 것이고, 그것을 상품화하는 일을 해나갈 것이다. ”
[인간 우찬규] 아트 프로젝트 전문화, 문화의 세기를 연다
우찬규사장은 1957년 부안 백산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한의학을 전공하기 위해 서당을 다녔다. 부안 고당 김충호선생이 그의 첫 스승. 두번째 스승은 부여 곡부서당의 서암 김희진 선생이다. ‘소학’이며 ‘대학’, ‘사서’ 등을 두루 공부하면서 철학있는 학문으로서의 한학에 매료됐다. 70년대 중반 민족문화추진회가 개설한 국역연수원에 합격했는데 당시 가장 나이 어린 합격자였다.그곳에서 2년동안 체계적인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그는 교과서를 만드는 일에도 참여했고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에서 ‘한한대사전’을 펴내기 위해 모집한 연구원 시험에도 응시해 합격했다. 스승인 신호열씨를 찾아다니다 고서화를 접하게 됐고 이후 전문성을 갖추어 88년 인사동에 고서화전문화랑 학고재를 열었다. 91년 도서출판 학고재를 등록하면서 출판사업을 시작했고 95년에는 소격동의 한옥을 구입, 현대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아트 스페이스 서울’을 열었으며 97년에는 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문화기획사 ‘아크 컨설팅’을 발족시켰다. 현재 학고재의 식구는 20여명. 모두가 전문분야에서 감각을 돋보이는 젊은세대들이다. 새롭게 시작한 ‘아트 컨설팅 서울’은 미술 전문 컨설팅의 영역을 확대해나가고 있어 이미 서울시와 부산시의 의뢰를 받아 대형 기획전을 치뤄냈고 삼성의 아셈빌딩의 조형물을 기획하기도 했다. 우사장은 이밖에도 고미술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문화예술인들이 모인 ‘우리문화사랑’에도 참여하고 있다.
[취재 뒷이야기] - '미술품처럼 아름다운 책을 만들고 싶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소격동의 ‘아트 스페이스 서울’은 국립민속박물관 건너편에 있다. 단아한 한옥에 들어선 현대미술 전문 미술관 ‘아트 스페이스 서울’의 공간 분위기는 퍽 이색적이었는데 한옥 내부의 구조를 고스란히 살려낸 전시실 한쪽 구석에 자리잡은 그의 방 책꽂이에는 학고재가 펴낸 수십종의 책들이 정갈하게 꽂혀 있었다. 학고재에서 펴낸 책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내용에서만이 아니라 그 품격을 더해주는 디자인이 학고재판으로서의 독창성을 그대로 돋보인다. 우사장은 네개의 아트 그룹을 거느리고 있지만 출판사업에 남다른 애정이 있다고 했다. 이런 바탕은 아마도 전공이 한학인에다가 고서에 심취해있는 그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을 듯 싶은데 늘 운영난에 허덕이는 출판업종의 환경을 고스란히 안고 있으면서도 웬만한 투자를 서슴없이 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각별한 애정은 증명이 된다.
그 한예가 최근에 펴낸 ‘중국회화사 3천년’. 화려한 장정에 얹혀진 이 책은 국가와 국가를 넘나들면서 제작되어진 것인데 그 비용만도 1억 5천만원이 투자된 것이라고 한다. 단일 종류에 이처럼 큰 돈을 투자 한 예도 흔치 않은 것이어서 출판계에 화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손해가 빤한 이 책을 소개하면서도 우사장은 희색만만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책을 미술품처럼 만들고 싶다. 내용에서도 그렇지만 오래보아도 항상 기쁨을 채워주는 그런 아름다운 책은 장식품처럼 쓰일 수 있을 것이다.”
학고재의 책들이 지금보다도 더 빼어난 아름다움을 갖춘다면? 그것은 물론 예술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