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하순경에 발생한 군산 대명동 윤락가 화재 사건을 신문으로만 접하다가 얼마전 이 사건 대책위원회가 군산 경찰서에서 모임을 갖는다기에 가보았다.
가난에 못이겨서 또는 길 잘못들어서 매춘 윤락행위에 빠져드는 젊은 여성들로 인해, 또는 이를 기회로 하는 악덕 포주들로 말이암아 빚어지는 사회적 퇴폐성은 비단 우리 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청장년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이든 축에 이르기 까지 몸가짐이나 정신상태의 건강성을 다함께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근자에도 서둘러서 소위 미아리 텍사스라는 1백50여개의 매매춘 업소 포주들이 관할 관청을 대상으로 소위 ‘상납계’라는 것을 조직해서 수삼개월 동안 6∼7억원의 금품을 상납한 사실이 밝혀져 관계 관청과 포주들 사이에 유착관계라는 것이 이제는 추측이 아니라 물적 증거로 드러나고 말았다.
이번 군산 대명동 사건에 있어서 필자는 재야의 한 사람으로 참관한 데 불과하고 그 사건에 대해 별 지식을 갖고 있는 처지도 아니다.
그러나 그 대책위 특히 그들 중 젊은 여성들의 주장과 호소는 들고 지나치기에는 너무 절절한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경찰측의 보고를 들어보면 법적인 질서가 또 분명한 것처럼 들린다.
문제는 이것이다. 한편은 국가 공무원들이고 한쪽은 몸으로 헌신하는 사회운동가들이다.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사회운동가들은 정치나 일본 행정에 있어서 불만이 많다. 이에 더하여 그들은 어떤 경우 정치나 사법에 대한 불신까지 가기도 한다.
공자는 정치에 있어서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을 ‘신(信)’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진리이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은 정치적 불신 현상은 모든 정치적 불투명성과 또는 국민대중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여 부와 전력을 누리는 자본가나 특권계급위주의 정치, 다시 말해서 민중민주주의가 아닌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되기 때문이다.
옛날 중국 한(漢) 나라 때에 주양유(周陽由) 라는 혹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법을 에두르고(於其所愛者 撓法) 미워하는 자에게는 법을 굽힌다.(於其所憎者 曲法)는 것이다. 이것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현대판 주양유는 얼마든지 있다. 날마다 신문에서 보는 것이 그것이 아니냐? 법망(法網)은 썩어 있다.
큰 고기는 다 그 썩은 그물을 찢고 나간다. 다만 그 썩은 그물조차도 찢고 나갈 힘이 없는 송사리 떼들만 그속에서 죽어가는 혈실이 아니냐?
옛날 당 나라에도 뇌물을 탐하고 부패 한 관리들이 있어 어떤 시인이 그들을 딱따구리 새에 비유해서 쓰기를 “딱따구리야 나무쪼는 일 그만 그치라(啄鳥休啄木) 큰나무가 반나마 패었구나(巨樹如半脈) 너는 바람 무서운 줄 모르는가.(爾獨不憂風) 나무가 넘어지면 네집도 없어진다.(木顚爾無屋)”라고 했다.
사실 국가가 말하면 탐관오리들도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국가사회가 드러나는 범죄행위로 망하기 보다는 드러나지 않는 익명성의 죄때문에 망한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모두가 밝은 마음으로 자기 책임을 감당해서 투명성이 보장되는 사회이다.
이것이 아니고는 아무리 법을 뜯어고치고 개혁이 어떻고 해도 다 공념불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선 첫째로 내 자녀교육에 떳떳한 부모가 되어야 한다.
불의하게 출세를 한다거나 돈을 모은 부모가 자기 자녀를 향하여 무어라고 가르칠 것인가?
/ 강희남(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