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과의 대화] (2) 서예가 여태명

예술, 생활속 공유돼야 '진정한 가치'있어


 

- '서예의 생활화, 한글서체의 아름다움을 생활속에 들여놓겠다'
- 한글서예자전 발간 작업, 컴퓨터용 한글서체 개발
- 다양하고 화려한 형식적 실험, 한글서예의 가능성 탐색
- 책표지 등 다양하게 활용되는 그의 한글서체

 

서예는 문자 예술이다. 문자예술은 그 기원으로나 기능으로나 지니는 의미와 가치가 다양하다. 서예는 그 다양한 의미와 역할을 딛고 서있는 일종의 정신 예술이랄 수 있다. 먹과 물, 그리고 그 정신의 오묘한 세계. 서예의 지점은 전통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지만 그 힘은 바로 그 정신의 오묘한 세계로부터 이어지는 예술적 깊이에 근거한다.

 

이쯤해서 전통에 대한 해석과 그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하는 당위성이 제기된다.

 

전통이 무엇인가. 현대적인 것과 새로운 것과 대치되는 개념으로서만 그것의 의미가 해석되어야 하는가. 전통이란 시대의 도도한 흐름을 담아내는, 그 자체로서 새로운 창조력으로 이어질 때 진정한 의미가 비로소 찾아지는 것은 아닌가.

 


 

효봉 여태명씨(원광대 서예과 교수)는 오랜 세월 이러한 물음으로 서예의 방향을 탐색하고 개척해온 서예가다. 올해 나이 마흔다섯, 불혹을 넘긴지 다섯해가 되는 그를 서력(書歷)으로만 평가한다면 돋보이는 예술적 역량을 갖춘 중진의 반열에 당당하게 서있음이 확실하지만 묘하게도 그는 여전히 삼십대의 패기와 실험적 작업에의 의욕이 충천해있는 젊은 작가로서의 이미지가 훨씬 강하다. 물론 이러한 이미지는 그의 예술적 세계의 원숙함과는 별개로 그가 견지해온 창작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문보다는 한글서예를 탐색해온 결코 짧지 않은 세월, 지각과 전각, 오브제에 이르기까지 서예의 형식적 실험을 다양하게 시도해온 열정,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서예를 그 중심으로 끌어내는 노력이 서예가로서 그를 지탱하고 있는 요소들이다.

 

고상하고 지적인 예술, 늘 진지한 철학적 사고가 요구되는 예술. 새로움에 다가가기 보다는 한자리에서 깊이를 실현해야 하는 예술. 만약 서예의 예술적 특성이 이렇게만 정의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는 이미 서예가로서의 본류를 한참 벗어나, 그의 표현대로라면 ‘샛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그처럼 단순하지 않다. 한국서단에서 예술적 역량을 인정받는 중견서예가이자 대학 강단에서 수많은 서예가들을 배출하는 교육자로 인정받고 있는 그는 한글 서체 자전 작업과 컴퓨터용 한글 폰트를 개발해낸 진취적인 예술사업가(?)로서의 자리가 탄탄하기 때문이다.

 

전통서예를 고수하는 경향이 지배하고 있는 서예계 풍토에서 보자면 아무래도 격려보다는 우려와 질시의 대상이 되었을 그가 그런 환경에 굴하지 않고 오늘에까지 자신의 소신을 지켜올 수 있는 바탕은 무엇일까.

 

“한자 한문에 문외한인 현대의 서예 감상자들의 표정없는 반응에 맞닥뜨리게 될 때마다 느꼈던 공허감은 참으로 컸다. 그것은 서예하는 사람으로써 안을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이었지만 그럴수록 예술은 생활속에서 함께 공유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동안 시도해온 작업은 바로 그 확신을 실천하기 위한 탐색의 과정이랄 수 있다.”

 

그는 예술이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고 어느 특정한 계층을 위한 예술은 스스로 한계를 좁히고 대중으로 부터 멀어진다는 확신은 그의 예술세계를 한걸음 더 일반 대중들에게 다가서게 했다.

 

생활속에서 한층 빛을 내는 서예의 쓰임새. 그의 화두는 ‘내 서예가 이 사회에 무엇을 남겼는가’로 결집됐다.

 

그동안 서예가 여태명이 이루어놓은 실천적 결실은 참으로 다양하고 화려하며, 그러면서도 서민적이다. 그러한 설친적 작업의 백미는 자신의 독창적 예술을 꽃피우게 한 한글서체 ‘민체’다. 민체는 예술의 자유로운 창작정신을 발휘해낸 결정체이다. 어딘지 모자라는듯한, 그러나 친근한 정서의 아름다은 이미지를 담고 있는 민체는 한국서예의 가능성을 열어가려는 그의 의지와 맞닿아 있다.

 

“서예술도 다른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자유스러워야하고 그 시대성과 자신의 사상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점에서 민체는 서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영역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가 이름붙인 민체는 궁체와 더불어 모두 필사본으로 되어 있는 한글류의 책들에서 나타난 서체이다. 그는 한글서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후 10여년동안 수집한 1천여권의 한글필사본을 통해 이 빼어난 아름다움의 민체를 얻어냈다. 이 필사본들은 어떤 작품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기록을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이를테면 한글의 실용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체는 ‘삼베옷에 짚신 신고, 헤어진듯 하면서도 풍요로우며 형식은 자유롭고 조형성이 잘 드러나있는 아름다운 서체’이다.

 

그는 이 민중적이고 아름다운 우리 한글서체인 ‘민체’에 개똥이체와 축제체를 비롯한 또다른 민중적 서체를 연구해 누구나가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용 글꼴로 개발해냈다. 이 서체들은 이미 책표지와 수많은 디자인 소재로 쓰여져 우리 생활속에 성큼 다가와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한글서체의 가능성을 단언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한글 서예의 조형성과 그 미학’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있지만 그것을 찾아내 현대속에 접목시키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의지가 굳다. 그의 자신만만한 예술적 실천이 여전히 아름다운 이유고 이 분명한 의지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