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는 억압과 고통의 때가 더 잦았다. 중국으로부터 비롯되는 정치적 억압뿐만 아니라 신분에 따른 계급적 억압, 그리고 환난과 천재지변에 의한 궁핍으로 오랫동안 끊임없이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과 결핍은 오히려 우리의 문화에 독특하고 강인한 아름다움을 은밀하게 압축하는 창조적 지혜를 기르게 했다.
그렇다면 억압과 결핍의 미학이 우리 영화산업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할리우드 영화의 제작 방식은 마치 공장에서 하나의 제품을 만들 듯이 철저한 분업화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특징과 장점이다.
일례로 B급 이하의 감독은 엄격한 계약에 의해 영화의 편집 과정에 결코 참여할 수 없다.할리우드는 아이디어와 돈과 통계와 각종 수치, 그리고 이것들을 담당하는 수많은 전문인력이 오랜 경험 속에 확보된 여러 코드의 흥행 논리에 맞추어 마치 컨베어벨트의 통조림 캔처럼 영화를 만든다. 여기에 작가의 정신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반대로 영세한 자본과 열악한 시설, 절대 부족한 전문인력, 허술한 마케팅 등 할리우드와는 비교조차 어려운 국내 영화계는 상업 영화조차 대부분 감독에 의해 작가의 작업처럼 진행된다. 기획에서부터 시나리오, 각색, 콘티뉴이티는 물론, 촬영, 편집, 녹음, 심지어는 광고에 이르기까지 감독이 참여하는 일은 다양하다. 이러한 제작 구조에서 세계시장을 뒤흔들 블록버스터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21세기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서 진정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은 할리우드와 같은 거대한 자본의 조성이나 합리적인 제작 시스템의 구축이 아니라 오직 감독과 제작자의 '작가정신'이다. 또는 다른 말로 '독립영화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의 이런 제작 방식은 어쩌면 지혜로서 장점일수도 있다.
오직 정신력으로 세계의 주목과 찬사를 받은 영화운동 가운데 패전 후의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과 또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기의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화 운동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한때 할리우드를 탈출해 뉴욕을 본거지로 일어났던 뉴 아메리칸 시네마 운동, 그리고 지금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이란 영화 역시 그 중 하나가 되겠다.
우리 문화의 뿌리는 '정신'에 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빼어난 미의식이지 자본의 규모나 앞선 기술력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적정한 투자와 수익이 지속적으로 필요해 흥행이 중요하고 그러자니 오락적이어야 하고 규모가 커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작가영화의 제작이 어렵다.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흥행에 관한 경쟁력을 오로지 작가정신의 미적 완성도에만 의존하는 '적은 예산의 독립영화'다.
디지털시네마는 이 실험 체계에 큰 희망을 준다. 물론 '적은 예산의 독립영화'를 완성도가 높은 작가의 영화로 만들어내는 작업은 쉽지 않다.
우리는 궁핍과 억압과 시련에서 오히려 에너지를 얻어내는 이 땅의 장인들처럼 강인한 '작가정신' '독립영화정신' 또는 '헝그리정신'이라 일컫는 가능한 기적을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전북에서 영화 작업을 하려는 나에게 묻는다.
어떻게 전북에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가? 그야말로 나는 한국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북영화를 만들려는 꿈을 갖고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아니라 메이드 인 전라북도다. 충무로는 이미 없다.
그러나 충무로 없는 충무로에서 한국영화는 리틀 할리우드의 망상에 젖어있다. 전북의 영화산업의 발전전략은 '리틀헐리우드의 망상' 對 전북의 '적은 예산의 독립영화'의 대립구조를 만들어 가는 길이다.
전북 안에서만 유통되는 '디지털시네마 전용관', 전북인 만 보는 '적은 예산의 독립영화' 그리하여 마침내 국제사회에 무성한 소문을 뿌리게 되는 전북영화의 물결, 이른바 "작가정신의영화" "헝그리정신의 디지털시네마" "적은 예산의 독립영화" "큰 정신 작은 영화"가 바로 전북 영화의 예술화 작업이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전북영화산업의 발전전략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문화운동이 지방자치단체보다 시민과 도민에 의한 민간단체의 자율적인 의지와 실천으로 이루어져야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성경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명기 제7장. 6절, 7절)
/영화감독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