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는 지금 곳곳에서 이해 집단과 정부 또는 이해 당사자간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고 수많은 주장들이 제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혹자들은 이 현상을 혼란으로 보고 집단이기주의나 지역이기주의 정도로 비판하며 집단적 욕구 분출을 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 사회에 부정적 영향만을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과정은 각자의 욕구들을 어떻게 조율하고, 만족시킬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규칙(Rule)을 합의하는 능력을 키우는 훈련의 장을 제공할 것이다. 최근 노동계와 의료계, 사회복지계의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건강보험 재정파탄에 대한 논의도 사회적 룰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진행될 것을 기대한다.
건강보험공단의 재정이 악화되어 2001년도 재정적자 예상액이 무려 4조 정도가 되어서 보험료 지급 불능 사태가 예상된다는 공단 측의 발표가 있었다. 재정적자의 원인은 의약분업 실시를 전후해서 보험공단의 진료비 지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출증가 이유는 건강보험 가입자 증가, 조제료?처방료 등 보험급여 범위의 증가, 노인인구의 증가 등 의료이용량의 확대, 의료기관에 지불되는 보험수가의 인상 등 복합적 요인이 있다. 이 중 진료비 지출 증가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99년 11월부터 2001년 1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단행된 44%(복리계산)의 급격한 '보험 수가 인상'으로 보여진다.
그 증거로 수가 인상에 의한 진료비 증가가 전체 진료비 증가액의 약 41%와 올해 적자 예상액의 45.8%를 차지한다는 정부측 자료를 제시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원인을 밝혀내고 그에 근거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진료비를 공단으로부터 받지 못한 의사들이 환자에게 진료비 전액을 요구하고, 환자는 보험료 납부를 거부하여 현 의료보장체계의 완전한 붕괴를 가져오는 불행한 시나리오가 현실화 될 수도 있다.
보험재정 파탄에 대한 대책은 '보험재정의 확충'과 '의료비 지출의 절감' 두 가지로 비교적 단순하게 제시할 수 있다. 다만 재정의 확충 방법이 보험료 인상이 아닌 사회보장예산의 증액으로, 의료비 지출 절감책도 의료 수가의 재조정을 핵심으로 한 소비자 중심의 해법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한다.
의료를 비롯한 교육, 복지 등은 공공성이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현재 30%에도 못 미치는 보험재정의 국가 분담율을 김대중 대통령의 공약대로 50% 수준으로 올리고 수가재조정, 진찰료와 처방료 통합 등 단기적인 대안과 함께 우리 나라 의료제도의 비효율성을 제거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안이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반면에 정부 일각에서 대안으로 검토하고 있는 민간의료보험제도, 일부본인부담제, 의료저축제도 등의 도입시도와 건강보험 재정적자를 빌미로 한 의약분업에 대한 회의론, 의보통합 백지화론 등은 해결해야 할 과제를 문제삼아 애써서 도입한 바람직한 제도를 훼손하고 현 의료보장체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퇴행적이고 위험스런 발상이다.
우리는 의약분업과 의보통합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의사와 정부, 의사와 국민, 정부와 국민간의 오해와 불신의 벽이 두터워 졌다. 보험 재정파탄의 원인을 밝혀내고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은 이 크나큰 손실을 보상하는 사회보장 확대의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건강보험 재정 파탄 위기를 단기적이고 미봉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은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 양진규 소장(전북기독교사회복지연구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