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메아리]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

 

 

 

저널리스트를 지향하는 한 사람으로서 내 나름의 저널리즘과 저널리스트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학자와의 관계 속에서 말해보고자 한다. 저널리즘(journalism)의 의미는 협소하게는 정기적인 출판물을 통하여 시사적인 정보와 의견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활동을 가리키고 넓게는 모든 매체와 방법을 동원하여 대중전달 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저널리스트는 이러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럼 학자는 무엇인가? 학자는 학문으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 즉 직업적으로 학문을 하는 사람이다. 학자는 무엇으로 인정받는가? 직업적 학자를 인정하는 것은 대중이 아니라 자기 분야의 동류 학자들이다.

 

 

학자들 세계를 곁눈질해서 본 나의 눈에는, 학자는 이들 학자 동무(同務, peer)집단에 의해 학위를 받고, 채용되고, 권위가 정해지고 자원과 권력이 배분되는 것으로 보인다. 학자는 철저히 자기 집단에 의해 발탁과정과 성장?쇠락이 결정되는 것이다.

 

 

나는 석사과정의 세미나에서, 선배학자인 교수와 예비학자인 동료들에게 단어나 수식 하나에서부터 주장의 근거가 합당한가와 주장하는 주제의 가치에 이르기까지 수정되고 철저히 해부 당하는 경험을 하면서, 이 소심하고 지겨운 과정을 직업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심한 회의를 하였다. 이 과정을 견딜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없는 사람은 학문의 길을 갈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직업적 학자가 될 능력이나 의지가 없다 하더라도 지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비학술적 잡지나 신문 등에 글을 쓰고 방송에 출연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다. 이들을 학자들과 구분하여 "저널리스트"라 총칭하면 어떨까? 저널리스트들은 동류학자들의 엄격한 비평(review)과정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훨씬 광범위한 이야기를 훨씬 적은 증거들을 가지고 주장할 수 있다.

 

 

좋은 저널리스트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가령 내가 기독교나 사회복지와 관련된 글을 썼는데 그 글이 일반독자들이 볼 때 이해가 잘 가는 글이고, 신학자나 사회복지학자들이 보기에도 맞는 소리가 많으면 좋은 저널리즘이다. 따라서 좋은 저널리스트는 관련 분야의 학자들의 논의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이를 대중적으로 가공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훌륭한 저널리스트의 역할은 훌륭한 학자의 역할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 훌륭한 학문을 잘 정리해 대중적 언어로 알려주는 저널리스트가 없다면 학문과 대중의 일상의 연결고리가 없어져서 학문의 현실성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또 저널리스트는 어려운 학문을 대중에게 전해주는 역할로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학문의 엄밀성 때문에 소심해진 학자들이 못하는 큰 질문이나, 시의 적절한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일을 저널리즘이 해야 한다. 학자는 학자를 대상으로 일하고, 저널리스트는 학자와 대중을 향해 글을 쓴다.

 

 

종종 교수의 직함을 갖고 학자인양 하면서 학자들을 향해 일을 하지 않고 대중에게 지식으로 군림하려는 사람들을 본다. 자신도 잘 모르는 전문용어로 대중을 주눅들게 하고 허세로 권위를 유지하려는 이들이다. 이들이 빨리 학자로서의 한계를 인정하고 저널리스트로 전향하면 역할이 있거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뛰어난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해부되어 망신당하는 결과가 우려된다.

 

 

좋은 학자와 저널리스트, 그리고 혹세무민(惑世誣民)을 구분하는 훌륭한 대중이 있는 한 거짓 학자, 나쁜 저널리스트가 '세상을 미혹하고 대중을 업신여기는' 죄를 더 이상 짓지는 못할 것이다.

 

 

양진규 소장(전북기독교사회복지연구소장,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