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즐거운 한가위 - 조영동.김용애씨 가족의 추석만들기

‘그 많은 추석음식을 장만하느라 부침개 기름 냄새에 찌들고, 피곤에 찌들고….

 

그런데도 남편은 복잡한 틈을 타 슬그머니 친구 만나러 나가 ‘찐∼하게’ 회포라도 풀었는지 한밤 중 고주망태가 돼 돌아왔다.

 

명절날 아침이면 새벽 차례상부터 시작해 오후가 훌쩍 넘어가도록 상차림-설거지-상차림을 반복하느라 점심 먹을 시간도 없다.

 

새벽부터 허리 한 번 못펴고 일 하는데 남자들은 한 손엔 떡 다른 한 손엔 전을 쥐고 TV 삼매경에 빠지거나 한쪽에서 잠만 잔다.

 

고스톱 치는 남자들의 “물 좀 줘!” “식혜 좀 더 줘!” 호령에 잽싸게 뒷수발을 들어야 하는 것도 여자들의 몫. 그러나 정말 화가 나는 것은 정성들여 허리 휘게 음식 장만한 건 여자들인데 정작 차례상에 절을 하거나 음복, 성묘는 아들만 하란다.

 

어렵게 졸라 겨우 친정집을 찾았는데 “빨리 가자!”고 조르는 남편 눈치를 볼 때면 차라리 명절이 슬퍼진다.’

 

한가위라고 해봐야 풍요로움에 흥겨워 여인들이 밝은 달 아래 강강수월래를 부르며 놀던 옛 정취는 사라진지 오래.오히려 음식 장만하느라 기름냄새에 찌들고 남자들 뒷수발에 찌든 여자들에겐, 특히 결혼한 여자들에겐 추석이 괴롭기만 하다.’

 

그러나 김제시 명덕동 조영동(61·농업)·김용애씨(56) 가족 여자들은 추석이 그리 힘들지 않다. ‘가사(명절준비도 마찬가지)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가풍 덕분이다.

 

음식 장보는 일은 부부가 상의해 예산을 짜고 함께 장도 본다. 장을 보며 무거운 것도 들어주고, 대신 값도 지불하며 아내의 든든한 남편 역할을 해 주는 일이 여간 즐겁지 않다는게 조씨의 생각.

 

음식장만도 아들·며느리가 모두 함께 참여해 후딱 해치운다. 아들만 4형제인 탓에 어려서부터 바쁜 어머니를 돕느라 부엌출입이 자연스러운 이 집 남자들은 모두 베테랑급 요리사.

 

음식장만이 끝나면 조씨 부부와 첫째·둘째 아들 부부, 아직 미혼인 셋째·넷째가 4팀으로 나눠 흥겨운 윳놀이판을 벌이느라 손주녀석들도 신이난다.

 

차례상부터 시작해 20번 이상 손님상을 봐야 하는 명절날에는 상 차리기, 설거지 등에 완벽한 분업화가 이뤄져 있다.

 

조씨 가족이 처음부터 이런 추석을 보낸건 아니다. 봉건적인 농촌마을에서 장자에 더구나 외아들로 자란 남편 조씨는 부부가 함께 농사일을 하면서도 집안일은 무조건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보수파였다.

 

하지만 마을 부녀회장으로, 전북생활개선회장으로 사회활동 영역을 넓혀나가는 아내 김씨를 이해하고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밥짓기, 청소 등 가사노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에 4형제 모두 명절 뿐 아니라 평소에도 집안 일 돕기에 열성적이다.

 

“남들은 사위가 앞치마 입고 밥하면 이쁘고, 아들이 그러면 속이 뒤집어진다는데 나는 안그래. 명절은 온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기쁘게 지내야 하는거잖어. 여자로 태어난게 뭐 죄라고 며느리들만 고생해야해?”

 

시어머니 김씨의 추석과 관련한 명쾌한 논평이다.김씨는 요즘 내년 명절부터는 첫째와 둘째 며느리가 서로 돌아가며 친정집에서 먼저 명절을 지내고 오게 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이십년 넘게 자식 키운건 똑같은데 딸의 부모에게도 아들 못지 않은 기쁨을 전해야 공평한 것 아닐까 하는 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