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 동반 자살

 

 



엊그제 전주에서 일가족 3명이 동반자살한데 이어 군산에서 또 40대 가장이 동반자살을 기도하여 자신은 미수에 그쳤지만 어린 두 아들이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한 가족은 악덕 고리사채 때문에 또 한 가족은 사업부진으로 인한 생활고가 자살을 선택하게 한 이유다. 좀처럼 회복기미를 보이지 않는 어려운 경제사정과 왜곡된 사채시장의 비윤리성이 단란한 두 가정에 비극적 종말을 앞당기게 한 것 같아 비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사실 IMF는 극복했다지만 서민들의 가계에 주름살이 걷힌 것은 아니다. 수출부진에 내수경기 침체, 물가고, 실업사태로 경제위기를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

 

이런 가운데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심화로 고액 수표 뒷장을 메모지로 쓰는 졸부의 아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점심을 굶는 어린이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절망과 고통, 갈등을 이겨내지 못한 가난한 서민들이 극닥적인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그러나 자살은 결코 올바른 선택이 될 수 없다. 흔히 ‘자살만큼 용기있는 행위는 없다’고 한다. 자살할 만한 용기가 있다면 이 세상에서 결코 못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자살만큼 비겁한 행위도 없다.

 

자살은 그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죄악으로 본다. 신에 주신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으로 단정짓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초까지 영국에서는 자살한 사람은 교회묘지에 묻히지 못하게 했다고도 한다.

 

생명을 외경스럽게 생각하는 사상은 동양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인의(仁義)를 지키기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희생을 인정한다. 우리 선인들은 적이나 반대세력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절막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서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용기를 보였던 것이다.

 

되풀이 강조하지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은 삼가야 한다. 죽을만한 용기가 있다면 그것으로 어떤 역경인들 헤쳐나가지 못할 것인가. 버려야 할 것은 절망이지 결코 목숨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