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돈보따리를 들고 인사로비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앞으로는 절대 용납 못합니다”
언젠가 과장급 여성공무원이 인사를 앞두고 관사를 찾아와 ‘엽전’을 놓고 간 사실을 두고 유종근지사가 간부회의에서 화를 벌컥 내며 던진 말이다. 상당히 오래전 일이지만 이때부터 적어도 ‘돈 받고 인사하는 지사’는 아니라는 인식이 공무원들에게 심어졌다.
이런 그가 과거 세풍월드로부터 큰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돼 있다. 지난 95년 민선시대가 개막되면서 개혁과 청렴의 이미지를 무기로 정치 일선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이 사건으로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나 마찬가지인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두번씩이나 그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도민들의 상심은 말할 것도 없지만.
검은 돈 유혹 떨치기 어려워
확정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버젓이 살아있는 마당에 그를 탓하자는 건 아니다. 정치시즌을 맞아 검은 돈의 그림자는 업보처럼 따라다니며 파멸로 이끌 수 있고, ‘화(禍)란 만족을 모르는데서 비롯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따름이다.
어느 국회의원은 정치인을 교도소 담장 위를 걸어다니는 사람으로 비유한 적이 있다. 항상 검은 돈의 유혹을 받기 마련인데 이 유혹을 떨치기가 아주 어려운 모양이다.
정치인들이 세비나 후원금만으로 살림을 꾸려갈 수 없다는 건 다 아는 사실. 때문에 교과서에도 없는 이른바 정치자금이라는 과목을 만들어 재원을 조달하는데 말만 정치자금이지 십중팔구는 댓가성 또는 보험성격의 자금일 터이다.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된 검은 돈은 평상시엔 아무런 색깔을 나타내지 않지만 이해관계가 얽힐 땐 그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만다. 그런데도 적당히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은 이 사실을 잊고 산다.
한보사건 때에도 돈을 받지 않았다던 어느 정치인의 언급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앙 정치무대에서 더 클 수 있는 인프라가 충분한데 왜 지방정치 쪽으로 방향을 틀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자금을 끌어 모아야 하는데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며 “시스템이 갈수록 투명해지기 때문에 옛날처럼 자금을 조성하기엔 너무 위험하다”고 털어놓았다.
실체 드러낼 땐 이미 후회
검은 돈의 유혹이 낼름거리는 선거철이다. 선거철 정치판에는 천당과 지옥이 늘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거 캠프에 ‘엽전’을 들고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그러나 불행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것처럼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리라
불경(佛經)에 나오는 우화 한토막. 한 홀아비가 소원을 풀어달라고 기원하던 어느날 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열어 봤더니 아름다운 ‘부(富)의 여신’이 서 있었다. 반갑게 맞아들였으나 항상 같이 다니는 동생이 있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아주 추하게 생긴 ‘불행의 여신’이 들어왔다. 홀아비는 그 추한 동생을 되돌려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애걸했지만 ‘부의 여신’은 그러면 우리 둘이 돌아갈까요 하고 반문했다. 홀아비가 망설이는 것으로 이 우화는 끝나지만 우리 정치인들이라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당장 눈앞에 어른거리는 돈에 홀려서 슬며시 등뒤에서 다가오는 불행의 여신을 언제나 뒤늦게야 보기 마련인데 실체를 드러내고서야 검은 돈이라는 사실을 알 때는 이미 후회하게 된다.
/ 이경재 (본보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