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교육열은 가히 세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무리 어려워도 자녀교육을 위해서라면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게 우리 부모들이다. 사교육비의 과중함을 호소하면서도 막상 학교 공부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보통 몇개 학원을 보내는 게 우리네다.
그러나 우리에게 학교 문턱조차 밟기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반세기도 안된다.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시절 제때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배움’은 항상 목마름이었다. 그 갈증을 달래준 것이 야학이고, 공민학교였다.
교육여건이 좋아지면서 교육의 한축을 담당했던 이들 야학과 공민학교도 하나 둘씩 사라져 오늘날에는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천연기념물’이 됐다. 그 공민학교가 전주에 남아있다. 다름아닌 전주진북고등공민학교로, 전국적으로도 유일하다.
학교 역사의 ‘유물’이라 할 공민학교를 붙들고 있는 송헌섭교장을 만나보았다. 그는 최근 고등공민학교 졸업생들에게 검정고시를 보도록 규정한 검정고시 규정이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권과 교육의 기회균등을 침해하고 있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공민학교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갖고 있는 최교장은 헌법소원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어려움들을 많이 이야기했다.
-고등공민학교 졸업생들에 학력 인정을 하지 않은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데 새삼 헌법소원을 제기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새삼스럽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동안 대통령에게 청원한 것부터 국회, 교육부 등 관련 기관에 수차례 건의와 청원을 해왔습니다. 우리 주장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감하면서도 몇 사람을 위해 법을 고치기는 어렵다는 대답이 많았습니다.
법을 고치는 대신 시설 등을 보완해 학력인정학교로 지정을 받거나 학생들을 학력인정학교에 보내면 될 것 아니냐는 원론적인 답변이어서 그 부당성을 법에 호소하게 된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잘못된 것으로 보십니까.
△사실 ‘50년의 한(恨)’이라고 할 만큼 검정고시에 맺힌 졸업생들의 아픔이 많습니다. 6.25전쟁의 어려움속에 만들어졌습니다. 학교 시설이 변변치 못해 천막수업·노천수업을 했고, 교사가 없던 시절에는 정규 교육으로 인정받지 못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현대화된 시설과 자격이 있는 교사, 연간 1백70일씩 3년간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3년간 제대로 교육이 된다면 검정고시 통과도 별 문제가 없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데, 어떻습니까.
△실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정규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검정고시를 치르게 해보십시오. 전부 검정고시를 통과하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중학교 학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고등공민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은 더구나 60대 이상 나이든 사람도 많습니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이 3년간, 그것도 저녁 시간에 학교에 나와 공부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자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공민학교 출신들의 검정고시 합격률이 떨어지는 추세인지.
△그렇지는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 합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검정고시 때문에 공민학교의 특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 나이드신 분들중 합격을 못해 몇차례씩 검정고시에 응시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공민학생들에게 무료 교육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운영하고 계시는지.
△몇 백억, 몇 천억원의 국가예산은 그림의 떡입니다. 반세기 넘게 자금자족하면서 꿋꿋하게 자존심을 지켜왔습니다.
교사와 학생들이 자갈밭에서 유실수를 기르고, 양계를 사육했습니다. 학생들은 국가로부터 장학금 한 번, 연필 한 자루 받지 않았고, 교사도 10원 한 장 받은 일 없이 자급자족을 했습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교사들의 봉사활동으로 꾸려가고 있습니다.
-한 때 6백여개에 이르던 공민학교가 지금은 모두 없어졌는 데.
△믿기지 않은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교육당국에서 학교 인가만 해주고 학교 육성책은 물론, 방향제시·지침 조차 하나 없었습니다. 교육여건의 변화와 함께 점차 설 땅이 없어졌습니다.
-공민학교가 사라지는 것 자체는 우리 교육여건이 그만큼 좋아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바람직한 방향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데.
△일부에서 공민학교를 학교 역사의 ‘유물’이라고 말씀하시는 데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공민학교는 한국교육의 산실입니다. 일하면서 배우고 그 속에서 꿈이 담긴 미래를 설계했습니다. 너도 나도 엘리트 의식과 최고의 권위만을 찾는다면 사회는 균형을 잃습니다.
평생교육시설이 많이 늘어나고 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못 배운 한을 갖고 있는 사람만 전북에 35만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좋은 시설과 관 주도의 교육이 결코 이들의 눈물을 닦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공민학교 발전 방향에 대해 한말씀 하신다면.
△현 입시체계의 교육을 실천적 인간중심 교육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교육은 고착된 현실을 달리는 화려한 황금마차가 아니라 진보적 미래를 향한 성실하고도 꾸준한 희망의 마차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헌법소원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는지.
△잘 됐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고도 50년을 꿋꿋하게 지켜왔습니다. 50년전 호롱불을 켜고 가마니를 깔고 시작한 학교입니다. 설립자이신 아버님(고 송동석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배우고자 하는 이가 있는 한 최후의 한 사람까지 가르칠 생각입니다.
▣ 송현섭교장은 누구?
온국민을 열광시켰던 지난 월드컵대회 개막을 앞두고 전주진북고생들이 2002번 애국가 연주에 도전한 것이 화제가 됐다. 기네스 도전이라는 타이틀을 함께 건 이 도전은 그러나 그 이면에 적지않은 논란이 있었다.
학교측이 ‘튀려고’ 학생들을 무리하게 희생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그 하나였다. 송헌섭교장은 이같은 비판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1인 1기’ 교육이 학교 방침이고, 학생들에게 도전 정신과 끈기를 심어줄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생각했는 데 사회서 보는 또다른 시각이 있음을 확인하고서다.
‘애국가 연주 사건’ 이후 송교장은 그래서 그에게 따라다니는 ‘아이디어가 많다’ ‘이벤트의 귀재다’는 말도 칭찬보다 비판으로 들리는 것 같아 조심스럽단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송교장이 자신이 원하는 일들을 멈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추진력과 고집을 알기 때문이다. 그 자신 또한 학교가 살고, 학생들이 신명을 느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할 뿐이이라는 생각이다.
설립자인 아버지의 대를 이어 78년부터 학교에 뛰어든 송교장은 공민학교를 바탕으로 87년 진북고를 탄생시켰다. 운동장도 없는 좁은 시설의 열악한 여건에서 그는 진북고를 7백여 학생의 보금자리로 만들었다. 진북고의 모태가 된 공민학교에 대해서도 애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고교와 달리 공민학교 자체는 국가지원이나 수익자 부담 없이 전액 무료여서 여러 부담이 따를 수 밖에 없지만 우리 사회에서 하나쯤은 꼭 필요한 학교로 생각해서다.
20여년째 공민학교 학생들과 호흡을 같이 해온 그에게 가장 기억나는 제자를 물었더니 한 명 한 명이 소중하다고 했다. 그래도 가장 기억나는 제자가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30년후의 약속’을 지킨 제자를 말했다. 뒤늦게 공민학교에 들어왔던 김옥선씨가 아들과 함께 공민학교 졸업후 30년만에 계명대 들어갔으며, 그 감동적인 이야기를 지난해 국민편지쓰기교육수기대회에 응모해 당선됐다.
교육사업에 헌신하며 근검과 절약이 몸에 뱄던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면서도 그런 생활이 싫어 학교 졸업후(원광대 국문과) 3년간 산에 들어가 고시공부를 하기도 했다는 그는 ‘아버지 그림자도 못따른다’는 말로 선친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냈다.
학생들에게 1인 1기를 강조하면서 그 스스로도 검도 4단 실력에다 장고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다.
▣ 진북고등공민학교는?
“달리는 차안은 3년간 우리의 공부방이었습니다. 영어 단어 한 개라도 더 외우려고 부단하게 노력했으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직장으로 학교로 가정으로 옮기는 생활은 하루하루가 참으로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행복합니다. 배우지 못한 학업을 뒤늦게나마 할 수 있었기에 그렇습니다.”
지난 2월 열린 진북고등공민학교 졸업식때 졸업생 대표의 답사 한 대목은 ‘요즘도 이런 학교와 학생이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무안하게 만든다.
1947년 야학에서 출발한 이학교는 1952년 피난민 촌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초등교육을 담당했다. 1955년 중학교 과정과 기술교육을 가르치는 고등공민학교로 다시 바뀌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소외계층의 산교육장이 되어왔다.
지금까지 이학교 졸업생만도 8천여명. 졸업생중에는 서울대교수를 지낸 분도 있고, 현재 전주에서 변호사로 활동중인 분 등 소위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분도 배출했다. 그러나 이학교는 엘리트 교육이 아닌 제때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보금자리임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왔다.
지난 6월25일 호롱불을 켜놓고 노천수업을 재현시킨 현장이 감동을 준 것도 어려웠던 시절 이학교가 담당해온 교육과 무관치 않다. 현재도 20대에서 60대까지 40명이 이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진북고 교사들의 자원봉사 아래 야간 수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올해부터 시단위까지 중학교 의무교육이 확대되고, 평생교육시설이 늘면서 이학교가 언제까지 계속될 지는 미지수. 다만 전국 유일의 공민학교라는 점, 우리 교육의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해온 살아있는 교육역사의 장이라는 점만으로도 이학교에 대한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이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