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 왠지 현대 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리타분한 단어의 느낌이다. 그렇다. 핵가족 시대에 가문은 큰 의미가 없는듯 하다. 과거처럼 가문이 자신을 지켜주고 그 후광으로 사는 때는 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족보까지 들추며 굳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사회에서 존경받고 두드러지게 활동을 해 나가는 집안은 많다. 이른바 신흥 명문가라고 할까. 본보는 앞으로 2주에 1번씩 도내에 떠오르는 신흥 명문가를 찾아 그들의 자랑거리와 살아가는 얘기를 들어 본다.(편집자 주)
요즘 ’전북 사회엔 어른이 없다’고들 한다.
물론 고위층 출신으로 나이많은 어른은 도내에도 많다. 그러나 지역에서 대사를 치루거나 사회적인 갈등,문제가 비등할 때 조용히 지혜롭게 나서 모두를 아우르고 지역의 발전을 이끌어 낼만한 존경하는 원로가 없다는 뜻이다.
지난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정읍 지역에 기관장이 이취임하거나 외부 손님이 오면 으레 맨먼저 찾는 곳이 있었다.
정읍시 장명동 동초교 옆 1백50년된 누옥. 호남학원의 설립자인 금남 박명규옹이 3대조부터 거처하고 있는 곳이다. 이름하여 박진사댁이다. 이곳에 뿌리를 내린 조부가 진사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집안을 드나드는 손님에는 위 아래가 없었다. 항시 대문은 열려 있었고 식객들로 행랑채는 만원이었으며 잔칫날의 연속이었다. 그에게는 15만 정읍시민 모두가 친구였다.
96년 거의 1세기에 가까운 나이인 93세를 일기로 별세하기 전까지 그는 지역의 어른으로서 ,그리고 정신적 지주로서 우뚝 존경을 받아왔다.
금남 선생은 2대째 무녀 독남으로 선대부터 만석꾼의 대지주였다. 지금의 호남 고속도로 정읍 휴게소에서부터 시내에 들어오는 땅 대부분이 그 집안 소유로 연간 소작농으로부터 거둬들이는 수입이 쌀 8천석이었다. 쌀 시세가 바닥인 지금 환산해도 연간 12억원이다.
얼마나 토지가 많았던지 사람 키보다 훨씬 큰 궤짝 에 문서가 가득 했단다.
호남학원에 출연한 60만평의 토지가 그 일부요, 지금도 행정 기관으로부터 전혀 못들어 본 곳으로부터 토지 보상비를 찾아가라고 간혹 연락이 올 정도다.
금남의 생애
그는 구한말 1904년생이다. 정읍 동초교를 졸업한 금남은 선각자 집안 답게 일찌기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동경서 중학교를 다니던 중 관동대지진을 만났다. 조선인 대학살을 피해 귀국한 그는 서울 보성고등 보통학교를 마치고 다시 동경 전수대학 경제학부 5년을 수학한 호남 지역의 대표 엘리트.
약소민족으로 일본서 뼈저리게 고생한 그는 ’교육만이 나라의 살길’이라는 애국 철학 을 실현키 위해 귀향했다.
전답을 팔아 46년에 국내 최초의 중등사학 학교 법인 호남학원을 설립했다. 이에 앞서 이미 그는 동초교 육성회장을 맡아 지원했고 정읍여중 개교시에는 교실 1칸 시설비가 1백원인 시절 3만원이란 거금을 쾌척한 바도 있던 통 큰 인물.
6.25 시절 주위에 수많은 지주들이 학살 당하는 가운데도 금남은 평소 쌓아온 덕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있었다.
그에게 인생의 굴곡은 많았다. 청빈이 상징이요, 성격상 야당이었던 그는 자유당에 반대해 국회에 출마했다 낙선의 쓴잔을 마시기도 했다. 물론 숱한 탄압도 받았다. 토지개혁과 화폐개혁이 단행되면서 그의 재산은 줄고 줄어 겨우 학교만 남아있을 정도였다.
그는 선이 굵고 사회 활동도 남달랐다. 초대 정읍농조장, 초대 교육위원, 정읍 애향운동본부장 , 로타리클럽 초대 회장 ,적십자 전국 상임위원 등 수도 없었다.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비롯한 많은 수상이 지금도 그의 자랑스런 업적을 빛내주고 있다.
평생을 향리에서 보낸 그는 직접 교장과 이사장을 맡아 학교 경영에도 혼신을 다해 호남학원을 오늘날 명문 사학으로 우뚝 세웠다.
빛나는 후손들
금남은 슬하에 무려 9녀1남을 뒀다. 대대로 독자 집안이니 반드시 아들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10번째 마침내 아들의 탄생, 성빈씨 (현 이사장)였다. 이 점에서 금남이 지역사회로부터 존경받는 또 하나 이유 중의 하나가 있다. 여자라곤 오직 조강지처 백영채 여사( 77년 77세로 별세) 하나 밖에 몰랐다. 재력가로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후사를 위해 축첩을 둘 수 있었지만 그는 일편단심이었다.
금남의 자녀 교육관은 대단했다.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딸 아들 구별이 없었다. 둘 다 생존해 있으면 올 8순과 76세가 될 큰딸 진순과 두째딸 진남이 각각 숙명여고, 진명여고 를 졸업했다. 여자를 서울로 유학보낸다는 자체가 일제 당시로서는 파격적 발상이었다.
이후 셋째 진희씨와 넷째 진후, 다섯째 진숙씨가 각각 이대, 여섯째 진옥,일곱째 진덕,여덟째 현숙, 아홉째 미경씨는 내리 숙대로 유학했다. 한 집안서 이대3명, 숙대 4명을기록해 아마도 양교 유사 이래 최다 한가족 동문 배출로도 기록할 만하다.
금남의 나이 40에 낳은 외아들 성빈씨 ( 현 이사장,62). 문자 그대로 금지옥엽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과감히 부모 품을 떠났다. 학문을 위해서였다. 고교를 전주(전주고 39회)서 다닌 뒤 한양대에서 학,석사를 마쳤고 미국 샌디에고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구파.
대학 강사, 무역회사 근무 등으로 오랜 객지생활을 해 온 그는 가문의 평생 업을 잇고자 90년대 귀향, 부친의 뒤를 이어 명문 호남학원을 경영하기에 여념이 없다.
금남의 사위와 자손들 중에는 대한민국서 내로라 하는 인물이 많기로 유명하다.
정재석 전부총리, 김 선 전법무차관 ,최병찬 미 펜실베니아 공대교수, 전홍렬 경남기업 사장,은재기 전원대 상대학장 등이 사위다. 이번에 군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된 강봉균 전부총리는 두째 딸 사위다.
대를 잇고 있는 외아들 성빈씨의 자녀들도 자랑스럽다. 4대째 외아들인 정준씨(36)는 카톨릭 의대를 졸업(정신과 전문의)하고 현재는 경희대 한의대 본과 4학년에 재학중이다. .부인 또한 안과의사로 서울서 남부럽지 않은 활동을 펴고 있다.그러나 언젠가는 귀향해 대를 이어 향토를 지키고 가문의 업인 학교 경영 일선에 나서야는 게 그의 절대 의무다.
두째딸 수현씨는 이대,서울대 대학원을 나와 대학서 시간강사로 뛰고 있다. 막내 딸 은희씨는 미국의 명문 비버리힐스 고교를 나와 연세대와 미국 코네티컷대를 졸업, 현재는 국제변호사로서 국내외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여걸이다.
가문의 중추로서 학자적인 인품으로 조용히 학교 경영에만 전념하고 있는 성빈씨는 ”호남학원을 전국적인 명문으로 육성하는 길 만이 지역사회와 가문에 대한 자신의 도리이자 의무“라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