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메아리] 자연, 생명의 원천

 

 

 

주말 휴가를 맞아 고향집 텃밭에서 작은 수확을 누렸다. 풋고추며 들깻잎이며 부추랑 상추를 거두고 세면장에서 땀에 절은 몸을 씻었다.

 

 

그러다가 문득 저 수해 현장의 처참한 모습을 떠올리고서, 미안하고 안타까운 생각에 망연하기도 했다. 목숨을 잃고 삶의 터전을 날려보내고, 먹을 쌀과 마실 물마저 끊김 참담한 모습에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우리는 또 한번 자연의 위력을 실감할 수밖에 없다.

 

 

지난 집중호우 때 고향 임실 집에 전기가 단 하루 공급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짜증나고 불편해 했던가. 냉장고는 쉬어 터지고 TV도 볼 수 없고 컴퓨터는 불통이고, 폭염 속에 선풍기마저 켤 수 없었으니 말이다. 아침마다 편안한 잠자리에서 일어나 정겨운 식탁에 가족과 함께 앉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대학 경영의 첫 행사로 수해 복구 지원 봉사에 나섰다. 물론 총학생회의 헌신적인 참여에 의한 진행이었지만, 학생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무논에 발 한 번 적시어보지 않은 그들임에도 정성스레 쓰러진 벼 포기를 일으켜 세워 묶는 정경은 오래도록 가슴에 기억될 것이다.

 

 

대학 게시판에 '호소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번 주말은 일체의 여행이나 유흥은 피하고 가능하다면 공부하던 펜도 잠시 뒤로 하고, 가까운 농촌을 찾아 나서자고. 학과별 또는 동아리별로 어려움에 처한 학우가 있으면 함께 나서서 거들고, 그게 아니라면 아무 곳에 가든지 기다리는 일손이 있을 것이기에 현장으로 나가자고 말이다.

 

 

자연과의 조화·친화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관점을 자연관이라 하자. 잘 알려졌다시피 이 자연관에서 동서의 차이가 현격하다. 서구의 자연관은 자연을 인간을 위한 존재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자연을 개척하고 이용하고 때로는 극복할 대상으로 여긴다.

 

 

서구인들은 큰 산을 오르고 나면 그 산을 정복했노라고 으쓱댄다. 그러나 수수만년 수억만년 의연하게 버티고 선 저 백두와 금강과 태백과 지리를 하찮은 인간 하나가 사력을 다해 기어올라갔다고 해서  그 산악이 인간에게 정복당한 것일까? 그러나 동양의 자연에 대한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자연은 인간과 친화의 대상이요, 동화의 모델이며, 궁극에 이르면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된다. 자연에 경외심을 갖는 이에게 산에 오르는 길은 '순례'의 길로 승화된다.

 

 

이런 관점에서는 자연은 훼손하거나 오염시킬 수 없는 법. 그야말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원천을 제공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자연보호라는 어휘에는 인간이 더 유능한 존재로서 자연을 돌본다는 관점이 스며들어 있다. 반대로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의 보호를 받는 미미한 대상이다. 그래서 나는 환경운동을 생명운동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역설해 오고 있다.

 

 

생명존중의 교육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생명 존중의 교육이어야 한다. 생명만큼 소중한 것이 또 오디 있으랴. 세상에서 가장 감독적인 어휘는 '살다'라는 동사이다. "살어리 살어리랐다"로 시작되는 〈청산별곡〉은 살다라는 단어에서 이미 감동적인 노래인 것이다.

 

 

결국 생명의 존귀함을 인식하고 내 생명을 보전하는 일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남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물을 아끼고 공기를 청정하게 유지하고 토양을 비옥하게 가꾸는 모든 일도 마침내 내 생명을 지키는 길로 통하는 것이다.

 

 

쓰레기를 줄이고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여기에는 생명의 원천인 자연을 존중하고 아끼며 함부로 훼손하지 않겠다는 절절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수해 지역 주민들의 처참한 모습이 안타깝다. 다가오는 한가위는 또 어떻게 지낼 것인지. 나남 없이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복구에 동참하고 온정의 손길이 함께 해야 한다.

 

 

풋고추와 깻잎과 상추쌈을 먹게 될 내 식탁이 또 다시 고마우면서, 아린 한 쪽 가슴을 지울 수 없다.

 

 

/이용숙(전주교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