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아이들이 보고 싶다. 맑고 밝은 눈망울과 훈훈한 가슴을 지닌 이런 아이들이 세상에 가득했으면 참 좋겠다.
우리 아이가 컴퓨터보다 책을 가까이하고, 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에 감탄할 줄 알았으면 싶다. 조급하게 종종거리는 대신 여유롭게 사색하고, 감성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다면.
'나'만 챙기지는 말고 일체만유의 생명을 함께 존중하면서, 사람 사이의 예절과 덕목을 소중하게 지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땀흘려 일하는 노동의 가치를 알면서, 자신의 능력으로 성취한 결실을 자랑했으면 싶다.
'정직'을 목숨처럼 간직하고서도 '용서'를 절대 미덕으로 삼았으면. 하고자 하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며, 어떠한 시련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굳건함이 넘칠 수 있다면. 타인에게는 한량없이 겸허하면서도 자기 스스로 긍지와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힘겹고 지친 아이들
전세계에서 우리 아이들만큼 고생하는 아이들이 또 어디에 있을까. 어깨가 무겁고 힘에 겨워 지쳐 있는 아이들- 누구를 탓해야 할까. 우리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찾기가 쉽지 않다.
아주 어릴 적부터 영어 공부에 시달리고, 별별스런 과외 공부에 짓눌려 있다. 피아노·웅변·논술·그림공부·태권도·외국어…‥.
이 나라 교육을 믿지 못하고 외국으로 떠나는 사람들, 죽기살기로 책만 읽히려는 어른들, 영어를 못하면 뒤쳐진다고 몰아세우는 부모들. 참으로 한심스런 작태들이다.
또 있다. 고층 아파트 주변에서 '목에 열쇠를 매단 아이들'을 흔히 보게 된다. 부모가 맞벌이거나, 양친 모두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서일 게다. 이 아이는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까, 누구랑 놀아야 할까, 아니면 숙제를 어떻게 할까를 모두 혼자서 판단하고 실행해야 한다.
원로 교육자 정범모 선생은 '친자(親子)시간'이란 용어를 제안한 적이 있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하는 시간이란다.
그리고 친자시간의 양은 자녀의 바람직한 성장과 비례한다고 얘기한다. 참 당연한 지적이라 생각된다. 아이들을 너무 볶아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방임해도 안 될 일이다. 아이를 믿고 기다리면서 사랑으로 보살펴야 하리라.
몸으로 가르쳐야
『탈무드』는“입으로 가르칠 때는 반항하더니, 몸으로 가르치니까 좋아지네”라고 타이르고 있다. ‘교학행일치(敎學行一致)’, 없는 설교는 공염불일 뿐이다. 공부하라고 책상 앞에만 주저앉힌다고 공부가 되던가.
나는 머지않아 교단에 설 우리 대학교 예비교사들에게 거듭 당부하는 말이 있다. 교사 자신이 일기를 쓰지 않거든 아이들에게 일기 쓰기를 강요하지 말라고.
또 교사는 책을 읽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독서 운운하지 말라고. 스스로 실천하지 않는 교육은 기운이 막히고 공허한 울림만 요란할 뿐이다.
21세기는 흔히 지식기반사회라고 한다. 여기서 '지식'은 교과서적인 주입 반복 암기에 의한 수동적인 내용이 아니다. 격변하는 국제화 정보화 다양화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창의적 사고를 의미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열거한 우리 아이들은 오늘의 청소년과 어른들도 모두 포괄한다.
어른들이 앞장서서 솔선수범하자. 입으로만 외치지 말고 실천궁행하자. 그래서 우리 모두 맑고 밝은 눈망울과 훈훈한 가슴을 지닌 희망의 새싹을 가꾸어 나가자.
/이용숙(전주교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