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김대중 대통령과 독일인들의 평가
2003-02-25 연합
주독 한국대사관은 지난 주 에곤 바르(81) 전(前) 독일 경제협력부 장관에게서 `김대중 대통령의 퇴임에 즈음해'라는 짧은 서신을 받았다.
이 서신에서 바르 전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이 지구 상에 마지막 남은 최악의 분단을 극복해 냉전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평화와 긴장완화, 교류협력을 강화하는 대북정책을 추진해온 것이 한국인들에게는 커다란 행운"이라고 평했다. 그는 이어 "남한과 북한에서 제기되는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족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는 정책을 끝까지 추진하는 김대통령의 끈기에 탄복했다"면서 노벨 평화상 수상은 이에 대한 국제적 인정의 증표라고 덧붙였다.
바르 전 장관은 빌리 브란트 총리 밑에서 총리실 차관으로서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책임을 맡았으며, 1972년부터 1990년까지 옛 서독 동방정책의 실무 부서인 특임부 장관을 지냈다. 이런 경력의 바르 전 장관이기에 김 대통령의 퇴임을 앞두고 `햇볕정책'에 대해 찬사로 일관하는 인사말을 보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르 전 장관 외에도 독일 각계의 지도자들은 김 대통령의 반독재-민주화 투쟁 경력과 국제통화기금 위기 극복 등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고 있다. 특히 민족 분단이라는 아픔을 경험한 독일인들은 한국의 분단상황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김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한국의 국익에 맞고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는 정책'으로 높이 평가해 왔다.
독일인들의 김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일회적이거나 `장삿속'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하르트무트 코쉭 한-독 의원 친선협회장이 최근 펴낸 책 `김대중과 만남'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김 대통령에 대한 평가 글을 쓴 필자들에는 요하네스 라우 현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전 대통령을 비롯한 독일의 정치, 경제, 학계, 언론계 등의 주요 인사들이 망라돼 있다. 곧 퇴임해 권력을 잃게 될 한국 대통령의 생애와 철학, 정치 등에 관해 평가하는 글을 이토록 많은 유명 인사들이 원고료도 받지 않은 채 기고한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지난 12일 베를린에서 열린 이 책의 출판 기념회에서 코쉭 의원은 김 대통령의 개혁 성과, 남북화해를 위한 기여를 기리고자 책자를 발간하게 됐다면서 퇴임 후 적절한 시기에 독일과 유럽을 방문해 강연 등을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국방장관을 지낸 폴커 뤼헤 하원 외무위원장은 "유럽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비교될만한 인물은 하벨과 바웬사 정도일 것"이라면서 "그러나 이들보다 더 큰 고통을 받은 김 대통령이 일관된 원칙을 세워놓고 꾸준히 추구해온 김 대통령의 인생에 관해 엮은 이 책을 젊은이들이 꼭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전문가인 뮌헨 대학교 정치학과의 고트프리트 카를 킨더만 교수는 "지난 2000년의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이 남북한 간의 긴장완화, 교류 및 공동사업을 위한 희망찬 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킨더만 교수는 "최근 한국 내에서 김 대통령이 이 획기적 계기 마련을 위해 물질적 수단을 투입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으나 과거 서독 정부도 동서독 관계를 완화하고 생활수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동독에 물질적 지원을 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김 대통령에 대한 독일 주요 인사들의 평가가 지나치게 찬사 일색인 점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국내 현실을 잘 모르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특히 대통령이 되고 난 뒤의 여러 실정(失政)과 잘못에 대해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객관성이 적지 않게 결여된 평가라고도 할 수 있다. `햇볕정책'의 실천과정에서 드러난 세부적 문제점들도 지적돼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김 대통령이 `사형수'가 되는 등 숱한 정치적 탄압 속에서도 살아나 민주적으로 정권을 쟁취했으며, 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그리고 모범적으로 IMF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경제를 성장시킨 지도력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특히 분단 이후 계속된 대결정책에서 벗어나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도입해 성급한 통일보다는 우선 남북한 평화공존체제의 정착을 추진해온 일에 대해서는 `역사에 남을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