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 全州와 한국영화

 

 

 

6·25전쟁이 끝난후 우울하고 어둡기만 하던 1950년대 당시 사람들의 유일한 엔터테인먼트는 영화였다. 스크린위에 펼쳐지는 또 다른 세계는 당시 일상생활의 고단함과 궁핍함으로 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게 했다. TV가 대량 보급되기 전인 1950∼60년대를 한국영화의 황금기로 꼽는 것도 이같은 사회적 상황 때문일 것이다.

 

당시 한국 영화문화의 중심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서울 충무로였다. 그러나 충무로와 쌍벽을 이루었던 또 하나의 중심지가 바로 전주였던 사실을 아는 도민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문화적 환경이 영화제작에 열악하기 짝이 없던 지방도시 전주가 그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한국 영화사에서 전쟁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피아골''아리랑'이 이 지역에서 제작되었고, 최초의 컬러영화인 '선화공주'나 '애정산맥''성벽을 뚫고''애수의 남행열차'등 당시 흥행성공작들도 전주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던 대표적 영화들이다.

 

'피아골''아리랑'을 감독한 이강천감독은 배우에서 출발하여 당시 전주 백도극장의 선전부장을 거쳐 감독반열에 오르면서 한국영화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전주 영화문화의 실질적인 주역이였다.

 

전주가 한국영화의 중심이였다는 사실은 전주에서 활동하던 영화인들이 제정한 '전북 영화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59년 한 차례에 그치고 말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상이였다는 영화사적 가치는 평가할 만하다. 지난 2000년 부터 전주 국제영화제를 전주에서 개최하기 시작한 것도 이처럼 반세기동안 단절됐던 영화사를 다시 잇는다는데 그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영화와 전북과의 인연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흥미로운 통계가 발표됐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02년 시도별 극장관객 및 매출액 현황'에 따르면 전북이 한국영화 관객 점유율 63.3%로 전국 16개 시도 가운데 1위를 차지하며, 전국 평균치 48.3%를 크게 상회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영화 팬이 가장 많은 지역임을 입증한 샘이다.

 

전주를 문화영상산업 수도로 육성하기 위한 작업이 지금 한창 진행중에 있다. 다양하고 풍부한 전통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어 입지여건은 이미 검증받았다. 여기에 첨단 디지털이 접무되면 전주가 한국 영상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하는데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정부당국의 과감한 지원을 다시 한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