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자유와 공정성을 생명으로"
얼마전 지난해 12월에 실시됐던 제16대 대통령선거의 전자개표조작설로 인해 떠들썩했으나 이는 싱겁게도 해프닝으로 끝났다.
지체장애인을 돌보는 특수학교 교사로 재직해온 정 모씨가 선거결과에 대한 사상 초유의 재 검표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인 것으로 밝혀졌고, 표본으로 추출한 투표지에 대한 재 검표에서도 소문과 같은 오차가 발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선무효소송도 자연스레 취하되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인터넷에 유포한 장난기 어린 음해성 글이 가져온 사회적 파장 및 비용은 엄청난 것이었다.
만약 정 모씨의 글에서처럼 핵심요원 19명과 1,600억원의 경비를 들여 조직적으로 개표를 조작했다면 전국에 설치된 240여개의 개표장이 온전했을 것인가 말이다. 지금과 같은 선거관리 여건 하에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투·개표에 있어서의 부정이란 너무도 고전적인 수법에 지나지 않고 너무 유치해서 세인들의 관심에서조차 멀어져 있는 것이 현실일진대 말이다. 또한 일부 층에서 선거관리위원회의 편파성 여부에 대한 우려의 시각이 있는데 선거관리조직 내에도 오류를 감시하는 민주적인 내부통제 기능이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편 87년 12월에 실시됐던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있어서도 모 종교단체의 사제단에서 개표부정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당시에는 수작업에 의한 개표방식이었지만 후보자의 득표수 합계과정에서 컴퓨터조작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컴퓨터귀신' 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어 여론을 형성해 갔다.
급기야 낙선자 측에서 개표관련자료를 요구함으로써 전국적으로 몇 트럭 분의 자료를 제출하였지만 그 당시에도 개표부정의 단서는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 당시 전국의 각 구·시·군선거관리위원회 개표소마다 많은 기자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이 현장에서 지켜본 바로는 의혹이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이의에 대해 긍정적인 기사거리로 다뤄주지 않았다고 본다.
지난해의 6·13지방선거에서 이미 그 성능이 검증되었고, 각 방송사별로 개표방송시스템을 운영하는데 따른 사회적 손실을 줄이려는 의도에서 전자개표시스템의 도입을 서두르게 되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시스템 오류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인식 때문에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에게는 개표기운용에 따른 부담이 실로 컸었다.
지난해 12월의 대통령선거에서 개표개시 직전까지 전자개표기 운용에 따른 실무상의 어려움이 많았고 그 와중에서 개표부정이라는 고도의 전략을 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현실을 익히 알고 있는데 전자개표부정이라니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돌이켜 보건대 그동안 혼돈과 질곡의 세월을 살아온 우리 국민들의 불신풍조가 낳은 필연적인 귀결이었지 않나 하는 자책감과 함께 우리 사회의 후진적인 정치 그리고 선거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증거라는 씁쓸함을 맛보아야 했다. 우리 모두는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의 입장에 있다고 본다.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낳는 법이므로 불신의 빌미를 제공했던 과거의 일들을 차근차근 회상해 볼일이다.
또 한편으로는 지난번 미국의 대통령선거 시 투·개표에 있어서의 부정의혹을 제기했던 엘 고어 후보의 용단이 떠오른다. 캘리포니아주의 재 검표과정에서 나타난 많은 부정행위들을 인지하고서도 사실을 밝히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선거무효쟁송을 철회했던 그 용기는 대체 어디에서 우러나는 것인지 사뭇 부럽다.
63년도에 선거관리위원회가 헌법상의 독립기관으로 창설된 이래 올해로 40년의 역사와 함께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의 연륜이 된 것이다. 이제 선거관리위원회도 국민들로부터 의혹이나 받을 만큼 어수룩하지도 않고 지난 연륜만큼이나 성숙해졌다. 앞으로도 국민들로부터 신망받는 기관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그리고 정당이나 후보자들도 자신을 먼저 앞세우기 이전에 자신에게 돌아올 어떤 이득이 종국에는 국익을 엄청나게 손상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냉정히 판단하는 자세를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희선(통영시선거관리위원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