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프에프스키는 '악령'(惡靈)이라는 작품 속에 현대인의 모델인 고독한 기사 키리로프를 등장시킨다. '인생은 불안하다. 괴롭다'는 게 키리로프의 인생관이자 현대인의 인생관이다. 절망 허무 자살 같은 병적인 정신 때문에 방황하게 되고 그 근원을 불안으로 규정하고 있다. 불안하기 때문에 죽으려 하고 자살하는 사람만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의 원천으로 간주되는 키에르케고르도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것을 불안으로 보았다. 그에게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절망이며 자기상실을 의미한다. 실존의 문제가 대두된 것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전쟁의 참화라든가 빈곤의 문제 등이 사회의 이슈로 새롭게 대두된 배경을 깔고 있다. 불안 절망 등에 대한 인식은 현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그 배경만 다를 뿐.
복합적 병리현상, 불안 요인
신자유주의의 출현과 그에 따른 경쟁의 심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구조, 노동시장의 유연성으로 인한 근로자들의 불안, 사회적 모순과 가치기준의 혼란, 구조조정에 따른 직장상실 및 소외, 부의 편재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 빈곤의 문제에다 최근에는 경제난까지 겹친 복합적 병리현상들이 현대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배경이랄 수 있다. 최근 자살이 급증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것도 이런 인간성 상실 환경과 무관치 않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지적처럼 절망은 죄악이며 자살은 무의미한 죽음이다. 칸트는 자연물과는 다른 인간의 모습,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존엄성이 있다고 보았고 여든 살의 일생을 '인간'을 탐구하면서 보냈다. 죽기 전 그는 물 탄 포도주를 한모금 마시면서 "이것이 좋다! (Es ist gut!)”는 최후의 말을 남겼다. 후학들은 이 말의 뜻을 두고 '포도주 맛이 좋다'는 의미로, '일생을 여한이 없게 살아 만족스럽다'는 의미로, '많은 일을 해 놓았으니 미래가 좋다'는 의미로 세갈래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두번째 해석에 무게를 두고 싶다.
죽음의 순간에 남긴 유명인사들의 최후의 말은 생애를 대변한다는 데서 흥미를 끄는데, 베토벤은 "친구여 박수를…. 희극은 끝났다”, 간디는 "내 나이를 완결했다”, 예수는 "이제 다 이루었다”는 말을 남겼다. 모두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의 기간을 만족스럽게 완결지은 내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최후의 말에서 우리는 자신을 아끼며 최선을 다한 인생의 존엄스런 모습을 보게 되고 숱한 역경을 극복해 낸 순간순간의 과정의 집합이 결국 인생의 완결로 이어지게 된다는 걸 느끼게 된다.
인생은 과정의 연속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신(神)을 상정했지만 꼭 신이 아니더라도 순간순간의 과정을 중히 여기고 만족하는 지혜를 갖는다면 불안과 절망의 늪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괴에테도 어느 글에선가 행복을 "결과로서 나타나는 게 아니라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했다. 탐욕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심해지는 바닷물과 같은 것이다. 성취하면 또다른 욕심이 생겨 만족할 줄 모르게 되는 법이어서 실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에서 행복을 느껴야 한다는 뜻이리라.
과정에 만족할 줄 아는 지혜
과정이 생략된 목적지상주의와 복합적 병리현상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죽음으로 내몬다. 기계문명의 발달로 육신은 한없이 편해지지만 심신은 그 반대로 한없이 고단해 진다. 방황하는 고독한 기사 키리로프의 인생관 처럼 인생은 불안하고 힘들며 괴롭울 수 있다. 그러나 이에 함몰되지 않고 자족하며 극복하려는 과정, 순간순간에서 만족을 찾는 과정, 그것이 인생이기도 하다. 칸트의 말 처럼 '좋다'라는 최후의 말을 남길 수 있는 과정을 만들어 간다면 훌륭한 인생이 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 힘들어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 몇마디 적었다.